
'위험한 관계'는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사랑을 게임으로 여기는 바람둥이 남자와 돈 많은 여자가 정숙한 여인을 유혹할 수 있는 지 내기를 벌인다. 바람둥이 남자는 저도 모르게 진짜 사랑에 빠지고, 게임을 제안한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던 제 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모두가 파국에 이른다.
이 흥미진진한 사랑의 이야기는 이미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했다. 그 다음으로 이 원작에 손을 댄 이가 바로 감독 허진호다. 마음을 나누게 된 두 남녀를 관조하듯 담백하게 그린 사랑의 이야기로 한국 대표 멜로 감독이 된.
그가 만든 영화 '위험한 관계'의 배경은 1930년대의 상하이. 강렬한 이야기의 매력이 여전하지만, 탐미적이고 퇴폐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는 그의 전작과 크게 다르다. 물론 허진호 감독의 영화임을 실감케 하는 순간들이 있다. 배우로서 번득이는 순간을 선사하는 장동건, 장백지, 장쯔이의 재발견이 그렇고, 감정의 세심한 포착이 그렇다. 그에게 '위험한 관계'에 대해, 달라진 사랑의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위험한 관계'라니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인데다 그간 만들어 온 '허진호표 멜로'와도 다르다. 어떻게 연출을 결심했나.
▶처음엔 많이 망설였다. 영화로도 훌륭한 작품들이었고 더욱이 한국에서도 만들었으니까. 고민을 했었는데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게 흥미롭기는 했다. 원작을 읽었더니 서간체 소설인데 너무 재미있더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좋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 쓰인 소설인데 연애 교과서로도 쓰였다더라.
-한국판인 '스캔들'을 연출한 이재용 감독도 잘 알지 않나.
▶만나서 물어봤다. 장난으로 '왜 나한테 제의 안 한 거지?'하더라. 어떻게 옮겨야 하나, 어디를 새롭게 해야 하나 질문도 했다. 일단 시대를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들이 나오는 것 같다고 하더라.
-실제로 1930년대 상하이라는 시대 설정이 절묘하다. 화려하고 탐미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시기다.
▶소설 원작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이 전혀 나오지 않지만 프랑스 혁명 이전 귀족 사회의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는 불안감이 있다. 기존 가치가 흔들리고 퇴폐적이기도 하고 쾌락을 쫓는 시대 상황이 당시 상하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극적이고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기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감독 허진호는 통속적인 삼각관계 같은 거 안 좋아하지 않나?
▶자기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제가 만들어 온 영화와 연관성도 있는 것 같고. 어린 베이베이와 미술교사가 처음 연애할 때의 설렘도 있고, 게임처럼 시작했다가 정말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있고, 배신과 질투도 있다. 사랑에 관한 여러 것들을 표현하는 구조인 것 같다. 사실 이건 어떤 원형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바람둥이 남자, 또 같은 벽을 치고 사는 순수한 여자,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했다가 결국 자기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전의 허진호 스타일과도 크게 다르다.
▶원작 있는 게 처음이고 시대극인데다 또 중국에서 영화를 찍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가 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클로즈업도 많이 썼다. 배우가 워낙 좋고, 가까이 가도 불편하지 않으니까. 심리가 표정에서 드러나니까 더 중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늘 예쁘고 잘생긴 배우를 캐스팅하나. 영화를 보며 좋긴 좋구나 했다.
▶그런가 보다. 좋더라.(웃음)
-스케일도 확 커졌다.
▶돈도 한국에서 찍은 영화보다 확실히 많이 들었다. 주된 배경이 된 세이판(장동건 분)의 외할머니 집은 실제 30억을 들여 지었다. 좀 크게 짓는다고는 했는데, 보러 가면서 큰 집이 있기에 '저건 아니겠지' 했는데 그 집이더라. 당시가 지금처럼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시기였다. 한국에서야 어쩔 수 없이 절제해야 했던 부분이 있다. 수영장 있는 큰 집을 어떻게 세트로 짓나. 유리 정원도 그렇고. 늘 인물 2명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엔 인물이 다양하고 공간이며 미술이 같이 가 재미있었다.
-그 와중에도 절제된 베드신을 보면서는 '허진호 감독이 맞구나' 했다.
▶그랬나.(웃음) 사실 중국은 등급이 따로 없이 전 연령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한다고 하니 미국의 한 프로듀서가 '용기있다'고 하더라. 섹스코드 없이 어떻게 만들 거냐고. 중국에서는 그게 안 되니까 '스캔들'처럼 만들 수가 없다. 대신 심리에 대한 느낌, 감정에 대한 느낌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관능적인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장동건이 데뷔 후 첫 베드신을 찍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신사의 품격' 찍기 전 아닌가. 키스신도 제대로는 안 한 것 같더라. '저 그런 거 안 해 봤어요' 하고 자기도 너무 신기해 하고. '친구'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남성적인 느낌이 물론 있지만 이번엔 상 남자로 변한 느낌이랄까. 마초적인 역할을 해왔는데 그걸 연애 관계에 잘 응용한 것 같다. 뚜펀위(장쯔이)가 찾아와 나가는 장면은 현장에서 박수가 나왔다. 그 순간의 복잡한 상황을 드러내는 눈빛, 표정이 정말 좋았다. 머리를 빗고 탁 문을 열면서 나갈 땐 모든 걸 계산한 것처럼 웃으면서 안아주고선 헤어지자고 차갑게 말한다. 돌아가는 뚜펀위를 바라보는 모습이 있는데 그 분노의 눈빛이 굉장히 강렬하다. 자기를 향한 분노였을 거다. 제가 참 좋아하는 장면이다.

-장동건이 천재같다고 그러셨더라.
▶장동건이란 배우에 대해 놀랐다. 천재 같다. 중국어는 성조가 있어서 외우는 게 정말 어렵다. 심지어 제가 그 대사를 현장에서 바꿨다. 그것도 여러 번. 밤새 외워나오면 현장에서 다시 외워야 하는 거지. 중국어를 그냥 외우는데 하나 달라지면 전체가 다 힘들어지지 않나. 그런데 그걸 다 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가봐야 한다. 굉장히 잘했다. 장쯔이 장백지도 중국어 하는 장동건에 감정이입이 잘 됐다고 했다.
-모지에위 역 장백지의 악녀 변신도 흥미로웠다.
▶이전까지 본인이 맡은 게 다 선한 역할이라고 하더라. 저도 원작을 보면서 나이가 많아야 하는데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실제 삶이나 기질이 모지에위와 닮은 부분이 있더라. 굉장히 카리스마도 있고. 사생활 이야기까지 다 솔직히 나눴는데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감정이 나오는 신에서는 무서우리만치 악마처럼 섬뜩한 모습을 보이는데, 원래 청순하니까 느낌들이 섞이면서 뭔가 더 공감 가는 느낌이 살아난 것 같다.
-뚜펀위 역 장쯔이는 어땠나? '스캔들'의 전도연처럼 순수한 인물이다.
▶장쯔이는 귀여운 면이 있고 또 섹시한 면이 있다. 청순해야 하는 인물인데 전구 갈아주는 신 등을 보면 순진한 느낌인데도 웃는 모습이 요염하다. 베드신은 아니지만 탁자신(?)에선 현장에서 급히 찍느라 표정을 못 봤는데 마지막 미소가 너무 묘했다. 평범하게 끝날 신인데 장쯔이의 환희가 굉장히 섹시한 느낌. '저 여자가, 이건 장쯔이구나' 했다. 세이판이 키스를 하려던 장면에서도 눈물이 0.01초 사이에 그냥 툭 떨어지는데 모니터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럴 때 감독하는 게 좀 재밌다.
-디렉션하지 않았던 게 화면에 담길 때?
▶기대하지 않았던 게 확 나왔을 때 재밌다. 장동건도 편지를 찢는 장면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다 뒤돌아 씩 웃고 나온다. 그거 장동건씨 설정이다. 나는 '이거 웃으면 안되는 거 아니야' 했는데 너무 재밌고, 또 느낌이 좋으니까 그걸로 갔다. 장동건이란 배우도 선수인 거다. '아 배우구나, 여기서 노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장동건은 워낙 품성이 좋고 결이 좋다. 이전엔 열심히 하는 배우라고 생각했다면 이번엔 타고난 연기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달까. 워낙 좋은 연기자지만 더 새로운 모습이 나온 것 같다.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와 이영애, '호우시절'의 정우성 등 배우들의 몰랐던 존재감을 끌어내는 데 원래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을 끌어내겠다 생각하면서 캐스팅을 하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도 찍으며 발견해가는 부분이 있나.
▶둘 다 섞여 있다. 배우가 지닌 선입견이나 틀이 있지 않나. 일부러 깨는 건 아니지만 찍는 방식 때문에 깨지는 게 있는 것 같다. 작업할 때 본인들의 모습들이 보는 상황들을 만들기도 하고.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그럴 땐 어떨까' 하고 물어본다. 물론 디렉션 해서 나오는 표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잘 모르겠을 때도 있고. 그럴 때 배우가 극중 인물의 표정을 지으면 정말 재밌다. 계산되지 않았는데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정.
-'호우시절'에 이어 거푸 중국에서 작업을 했다.
▶'호우시절'은 소품처럼, 짧은 기간 벌어지는 일을 찍고 싶었다. 이번 '위험한 관계'는 제의가 왔고, 한국에서 같은 제의가 왔어도 찍었을 것 같다. 이전에는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이번엔 이야기가 마련돼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한국에서 해야지. 지금 '덕혜' 작업을 하고 있다. 완성된 이야기도 관심이 있고.
-장르는 멜로가 되는 건가? 여전히 대표적인 멜로 영화 가독이다.
▶'위험한 관계'를 멜로라 할 수 있을까. 멜로를 만들어야겠다는 게 아니라 생활에서 이야기 소재를 찾아서 사람 둘을 놓고 이야기를 쓰다 보면 그렇게 된다. '봄날은 간다' 경우도 사운드 채집하는 사람 이야기가 재밌겠다 하다가, 아나운서랑 여행가면 어떨까 하고 나온 거다. 주위에서는 그걸 멜로라고 하고. 그런 게 반복돼서 바꿔보려고 했는데, 만들고 나면 또 재미가 있다. 여러 감정이 표출되지 않나. 감정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게 재밌다. 그러다보니 멜로 감독이 됐다. 실상을 알면 놀랄 거다. 굉장히 안 로맨틱하고 그런 거 굉장히 불편해 한다. 오그라든다고 한다지? 진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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