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구 여제' 김연경(37·인천 흥국생명)의 마지막은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극적이었다. 2년 전에 이어 다시 한번 뼈아픈 리버스 스윕의 희생양이 될 뻔 했지만 여제는 제 손으로 자신의 커리어와 팀에 가장 짜릿한 엔딩을 선사했다.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이 이끄는 흥국생명은 8일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열린 대전 정관장과 도드람 2024~2025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5전 3선승제) 5차전에서 세트스코어 3-2(26-24, 26-24, 24-26, 23-25, 15-13)로 이겼다.
이로써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커리어 초반 거둔 3회 우승과 2018~2019시즌에 이어 6년 만에 5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팀의 3차례 우승을 이끌고는 모두 챔프전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쥐었던 김연경은 이번에도 전체 31표 중 만장일치로 통산 4번째 챔프전 MVP를 수확했다. 역대 2번째 만장일치 MVP다. 데뷔 시즌 신인왕과 함께 챔프전 우승을 견인한 뒤 MVP를 차지했던 김연경은 마지막 시즌에도 똑같은 그림으로 팀에 우승을 안기며 챔프전 MVP를 손에 넣었다.
흥국생명은 아포짓 스파이커 투트쿠 부르주(등록명 투트쿠), 아웃사이드 히터 정윤주, 미들 블로커 아닐리스 피치(등록명 피치), 세터 이고은, 아웃사이드 히터 김연경, 미들 블로커 김수지로 나섰다. 리베로는 신연경.

정관장은 세터 염혜선, 아웃사이드 히터 반야 부키리치(등록명 부키리치), 미들 블로커 정호영, 아포짓 메가왓티 퍼티위(등록명 메가), 아웃사이드 히터 표승주, 미들 블로커 박은진으로 맞섰다. 리베로로는 노란이 나섰다.
1,2차전을 승리한 뒤 3,4차전을 연달아 내주며 위기에 몰렸던 흥국생명은 6082명이 찾아 5경기 연속 만원 관중을 이룬 뜨거운 열기에 보답하는 명품 시리즈를 펼쳤다.
운명의 5차전. 1세트 흐름은 정관장이 가져가는 듯 했다. 10-10까지 팽팽했던 분위기에서 정관장이 리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표승주의 시간차 공격에 이어 메가의 퀵오픈까지 성공했다. 부키리치까지 득점 행진에 가담했고 정관장은 19-14로 5점 차까지 벌렸다.
만원 관중 앞에서 흥국생명은 믿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윤주를 대신해 투입된 김다은의 공격이 성공하며 분위기를 살렸고 투트쿠의 서브 에이스까지 터졌다. 피치는 메가의 스파이크를 차단했고 이고은의 패스 페인팅까지 성공하자 삼산체육관을 가득 메운 팬들이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김연경은 초반 블로킹을 잡아내며 역대 포스트시즌 9번째 50블로킹의 주인공이 된 김연경은 연이은 득점으로 결국 동점을 만들더니 김연경의 손에서 역전까지 나왔다. 메가에게 오픈 공격과 서브에이스까지 내주고 다시 역전을 허용했으나 김연경이 동점을 잡아냈고 메가의 백어택을 막아 재역전을 성공시켰다. 메가의 공격이 적중하며 듀스로 향했지만 범실이 나왔고 마지막은 김다은이 장식했다. 이번에도 정관장의 가장 믿을 구석인 메가의 백어택을 가로막으며 치열했던 1세트를 가져왔다.

2세트만큼은 정관장이 따낼 것으로 보였다. 정관장은 2세트 초반부터 앞서갔고 흥국생명의 연이은 범실로 23-19로 달아나며 세트스코어 동점까지 2점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흥국생명의 힘은 3,4차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피치의 이동공격으로 대역전극의 시작을 알렸고 염혜선의 오버네트까지 나오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정관장은 메가의 득점으로 세트포인트에 다다랐지만 김연경의 오픈 공격을 막지 못했고 박은진의 속공은 김수지에게 막혔다. 표승주의 공격을 투트쿠가 가로막아 듀스로 향했고 이번에도 김연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은진의 속공을 블로킹해내더니 이고은이 올려준 공을 정확히 코트 구석에 찔러 넣어 대역전극을 이뤄냈다.
주축 선수들의 줄 부상 속에 5차전까지 끌고온 정관장으로서도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3세트 초반부터 부키리치와 정호영이 연속 득점하며 메가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이어 메가가 블로킹에 성공했고 부키리치와 상대 범실, 메가의 오픈 공격에 이어 염혜선의 서브 에이스까지 터져나오며 7-1까지 크게 앞서갔다.
12-5에서 2점을 더하는 동안 5실점하며 흔들리자 타임아웃을 부른 고희진 정관장 감독은 14-10에서 "냉정하게 하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번에도 흥국생명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21-16에서 상대 범실과 투트쿠, 임혜림의 서브 에이스, 부키리치의 오픈을 투트쿠가 막아내며 1점 차까지 쫓았다. 20-23에서도 투트쿠와 상대 범실, 피치의 블로킹으로 23-23 동점을 만들어냈다. 결국 듀스까지 김연경의 뼈아픈 네트터치가 나왔고 표승주의 깔끔한 공격으로 3세트는 정관장이 차지했다.
범실이 무려 10개나 나오며 쉽게 갈 수 있는 흐름을 살리지 못했으나 9점을 올린 메가와 함께 부키리치가 8점을 보태며 흥국생명의 수비 라인을 무너뜨린 게 결정적이었다.
분위기를 가져온 정관장은 기세를 이어갔다. 이번에도 세트 초반부터 점수 차를 벌려나갔다. 이번엔 극적인 승부도 없었다. 흥국생명 리베로 신연경이 무릎 통증을 호소했고 도수빈이 다급하게 커다란 조끼를 입고 투입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 정관장은 3세트와 달리 범실 없이 적중률 높은 공격을 펼쳤다. 흥국생명이 따라갈 틈을 주지 않았다. 메가와 부키리치가 지칠 수 있는 상황에서 표승주가 공격 선봉에 나서며 흥국생명을 흔들어놨다.
흥국생명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20-24에서 피치와 김연경의 연속 득점에 이어 김연경이 블로킹까지 성공하며 23-24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3연속 듀스 승부를 펼쳤으나 이번엔 달랐다. 정관장의 해결사 메가가 마지막 점수를 책임지며 승부를 5세트로 끌고 갔다.
5세트 매 순간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양 팀 모두 한순간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트 초반 이후 단 한번도 점수 차는 2점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11-11 팽팽한 상황에서 정관장 표승주의 치명적인 범실이 나왔으나 김연경의 공격을 메가가 막아냈다. 12-12.. 투트쿠가 해결사로 나섰다. 연달아 공격을 상대 코트 구석에 꽂아넣으며 챔피언 포인트에 도달했다. 마지막에도 투트쿠의 퀵오픈을 정관장이 살려내지 못해 최종 승자는 흥국생명이 됐다.
이 중에서도 단연 가장 돋보인 건 김연경이었다. 김연경은 블로킹 7개, 서브 에이스 하나 포함 34점을 올렸다. 투트쿠가 26점, 피치가 8점, 김다은이 9점, 팀의 V5에 힘을 보탰다.
정관장에선 메가가 양 팀 최다인 37점, 부키리치가 19점, 정호영과 표승주가 각각 16점과 14점으로 분전했으나 결정적인 순간 집중력에서 밀리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