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 포스터/사진제공=넷플릭스
올해 큰 화제를 모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다.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천재 변호사 우영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따뜻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영우 같은 능력을 지닌 자폐인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현실과 괴리감이 크다는 한계점도 드러냈다.
콘텐츠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은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스타뉴스는 창간 18주년을 맞아 세상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거나 받아들인 콘텐츠에 대해 짚어보고, 콘텐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K-팝, K-드라마, K-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사회 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을 찾아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본다.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 스틸/사진제공=넷플릭스
좋은 영화는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종종 개인과 세상에 화두로 남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올해 한국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영화다. 5월18일 공개된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넷플릭스 영화 순위에 2위로 진입한 뒤 한동안 1위를 지켰다. 베트남, 홍콩 등에서도 정상에 올랐으며 대만,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10위권에 들며 넷플릭스 영화 부문 세계 18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이 이 작품을 한국 뿐 아니라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전세계 190개국 구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2020년 초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일명 'N번방 사건'의 추적기를 담았다. 'N번방 사건'은 텔레그램에 비밀방을 만들고 어린 소녀들을 비롯해 많은 여성들에게 끔찍한 성폭력을 자행한 온라인 채팅방 사이버 성범죄다. 2019년 초부터 알음알음 SNS상에서 떠돌았던 이 사이버 성범죄는 언론인 지망생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 등과 언론의 추적, 경찰의 끈질긴 수사 등으로 2020년 실체가 드러났고 마침내 N번방 운영자 '갓갓' 문형욱과 박사방 운영자 박사 조주빈이 검거됐다.
N번방 사건은 사이버 시대의 끔찍한 그늘이다. 사이버 세상에서 익명을 이용해 여성의 인권을 참혹하게 유린한 사건이다. 급증하고 있는 사이버 성범죄와 사이버블링 등을 축약한 것이나 다름 없는 범죄다. 피해자들을 유인한 뒤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유포해 사회적인 충격과 전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20만명 이상 청원만 9건에 달해 국민청원에서 역대 최다 동의를 받기도 했다.
워낙 화제가 됐고, 시대의 끔찍한 그늘이 담긴 사건을 다뤘지만, 무엇보다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가 의미있는 건, 이 영화의 태도다. 이 영화의 태도야 말로 지금 한국 사회에 던진 중요한 질문이다.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범죄자의 이유를 담지 않았다. 피해자의 사연을 적나라하게 전시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이 사건을 추적하는 사람들을 담았다. 활동단과 기자, 탐사보도PD,경찰까지 24명의 사람들을 잇는다.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주인공이 계속 바뀌는 건 위험하다. 화자가 바뀌다보면 자칫 이야기가 산으로 흘러가기 쉽다.
하지만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다르다. 마치 릴레이 바톤을 이어받듯 범인을 쫓는 사람들이 이어진다. 나열되는 게 아니라 이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범인을 잡는 모습이 담긴다. 이 영화는 우직하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잡힌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범인의 목소리는 딱 하나만 담긴다. 체포된 뒤 "악마" 운운했던 조주빈의 말을 비판하기 위해 담았다. 악마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범죄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의 이 태도야 말로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보편적인 도덕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무너지는 법이다. 나쁜 짓을 하면 잡힌다, 그리고 이 나쁜 놈을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화두를 던진다. 마치 범죄스릴러 영화처럼 그저 범인을 잡는데 오롯이 초점을 맞춘다.
한국 다큐멘터리인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에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인 건 장르영화 같은 이 영화의 만듦새와 더불어 이 영화가 견지한 태도 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 사이버 스페이스, SNS, 이제 메타버스까지 확대되고 있는 사이버 성범죄는 비단 한국 만의 문제가 아닌 탓이다. 피해자에게 절대 누를 끼치면 안되고, 범인의 이유를 담지 않고, 범인을 잡는 데 여러 사람들이 연결됐다는 태도. 이 태도가 전하는 질문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를 연출한 최진성 감독/사진제공=프릭쇼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를 연출한 최진성 감독은 '저수지의 개들'과 '더 플랜', 'I AM' 등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랬던 그가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를 만든 건, 처음부터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달달함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정의라는 달달함.
최 감독은 "당시 상업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에서 범죄 다큐멘터리 연출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인 이춘재가 마침 잡힌 뒤여서 그 아이템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놓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N번방 사건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범죄인데다 사이버 범죄라는 점에서 전세계로 공개되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과 맞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시작은 그랬다. 원칙을 세웠다. 피해자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피해자를 등장시키진 않는다, 범죄자의 내러티브를 담지 않는다, 그렇게 원칙을 세우다보니 남는 건 추적자의 시선이었다. 추적자들을 설득했다. 흔쾌히 응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특히 형사들은 자칫 이 영화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줄까 저어했다. 최진성 감독은 경찰청 사이버수사대를 찾아 한국의 사이버 수사 실력이 CIA,FBI 못지 않다는 걸 넷플릭스를 통해 알려주자며 설득했다. 최 감독은 "기자, PD, 활동단 등 다른 추적자들도 피해자들에게 누를 끼치면 결코 안된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형사들은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범죄 추적물에서 범죄자의 내러티브가 없고, 피해자를 담지 않는다는 건, 사실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최 감독은 "큰 도전이었는데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 영화를 추적하는 사람들이 바톤 터치하듯이 릴레이하듯이 서사를 꾸몄다.
"영웅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추적자 누구 한 사람의 공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만들고보니 보이지 않는 연대라는 게 이런게 아닐까 싶더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24명의 추적자 뿐 아니라 이 사건을 공론화하는 데 일조한 수많은 트위터리안, 국민청원을 해서 특별법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은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연대를 한 것 같다."
최진성 감독은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이 이야기를 끝까지 볼 수 있으니깐. 그렇지만 그럼에도 만드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3명을 보호자 동반 아래 인터뷰했지만, 그 피해자를 만나는 것도 여성 제작진이 했다. 최 감독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녹취록을 듣지도 않았다. 피해자의 음성을 듣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녹취록을 담은 텍스트로만 봤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고 난 뒤 정의라는 달달함를 다시 생각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의 대사 중에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한가'라는 게 있다. 그런데 결국 영화 속에서 이병헌 등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그 달달한 정의를 이루게 된다. 마음 속에 그 달달함이 동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을 만들고나서 깨달은 건 다들 마음 속에 정의라는 그 어떤 달달함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각자 자기 일을 했지만 마음 속에 있는 어떤 달달함이 연결되고 연결돼 범인을 잡기까지 이어지도록 한 게 아닐까 싶다."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다. 자극적인 묘사가 없지만 소재적인 이유로 그런 등급을 받은 듯 하다. 최 감독은 "이 작품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지만 보호자와 함께 청소년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교육영화로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시대에 좋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관객에게 달달함을 남긴다. 그 달달함이 쌓이고 쌓여 세상을 바꾸는 달달함으로 연결된다. 하늘의 구멍은 크고 성긴 듯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늘의 뜻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그물은 그런 달달함이 연결돼 만들어지는 것 같다.
'사이버 지옥: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그런 사람들의 그물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MZ세대에게 적극 권한다.
전형화 기자 aoi@mtstar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