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척척박사] 33.떡은 곧 정情, 의미와 상징성

전시윤 기자  |  2023.03.16 10:27
인절미 /사진제공=pixabay 인절미 /사진제공=pixabay


'누워서 떡먹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남의 손 떡이 커 보인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떡과 관련된 속담이 무려 19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하니, 그만큼 떡은 우리 생활과의 밀접함을 방증한다.

'떡'은 곡식가루를 시루에 안쳐 찌거나 쪄서 치거나, 혹은 기름에 지져서 굽거나 빚어서 찌는 음식으로 역사도 깊다. 지역에 따라 종류도 다르며 재료에 따라 제조 방법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지역적 특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

떡과 관련하여 중국에서는 밀가루 보급의 경계가 되는 한나라 이전에는 떡을 이(餌)라 표기하고 쌀·기장·조·콩 등으로 만들었다. 밀가루를 먹기 시작한 한나라 이후에는 밀가루로 만든 떡을 따로 병(餠)이라 했다. 우리는 떡을 주로 쌀로 만들지만 이餌라 않고 '병'으로 쓰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동양 3국의 떡을 비교하기를, 중국은 밀가루로 굽는 것이 본위이고, 일본은 찹쌀가루로 치는 것이 본위이며, 우리나라는 멥쌀가루로 찌는 것이 본위로 시루떡이 우리나라 떡의 기본형이라 했다. 무려 시루떡의 종류가 1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럼 언제부터 우리는 떡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을까. 청동기시대 유적인 나주 초도패총 및 삼국시대 고분군에서 시루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의 고구려 고분 안악 3호(357년) 벽화에 여인이 막 찐 시루에서 떡을 떼 내 그릇에 담는 모습은 오늘날 시루떡을 보는 것 같다.

또한 '삼국사기'에 유리와 탈해 두 왕자에게 떡을 베물게 해 이빨 자국이 많은 이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 정초에 술·떡·밥·과실 등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떡을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건국 초부터 권농정책을 힘써 쌀밥이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떡과 조과류가 발달 되었다. 또 불교의 융성으로 육식절제와 차 마시는 풍습이 발달하여 더욱 떡이 발전하였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의 상화병이 수입되었고 반대로 고려병을 수출하기도 했다.

원나라 문헌 '거가필용'에는 밤을 그늘에 말려서 껍질을 벗긴 뒤 찧어 가루를 내고 여기에 찹쌀가루를 3분의 2 정도 섞어 꿀물을 넣고 쪄 먹는 고려율고(高麗栗?) 즉 밤설기떡을 소개했다. 1765년에 쓴 한치윤 '해동역사'에도 밤설기떡인 율고를 잘 만든다고 중국인의 칭송을 싣기도 했다. 1613년 펴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송사'를 인용해, 고려는 상사일(음력 3월 3일) 청애병(쑥떡)을 으뜸가는 음식으로 삼았다고 한 내용으로 보아 떡이 하나의 절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의 '목은집'에 유두일에 먹는 단자병(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삶아 으깬 뒤에, 밤, 팥, 대추 등의 소를 넣고 둥글게 빚어 겉에 꿀을 발라 고물을 묻힌 떡)과 점서(粘黍)에 관한 시는 이를 뒷받침 한다. 또 '고려사' 열전 최승로조에 광종이 떡을 걸인에게 시주하였다는 기록을 비롯해 신돈이 떡을 부녀자에게 던져주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일반에게까지 떡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편 /사진제공=pixabay 송편 /사진제공=pixabay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떡을 만드는 기술의 발달로 떡의 쓰임새가 다양해졌다. 특히 궁중과 반가에서는 떡의 종류와 맛이 한층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증보산림경제', '규합총서', '음식디미방', '임원십유지', '동국세시기' 등 각종 고문헌에 기록된 떡의 종류만 200종이 넘고, 떡이 재료 가지 수도 95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떡은 빵과 같은 서양식 식문화의 도입으로 떡의 소비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직접 해먹던 떡도 떡 방앗간의 증가로 떡 만들기가 분화되면서 떡의 생산과 소비 주체가 분리되었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손님이 오거나 명절이면 떡을 해먹었다. 떡은 계절적으로는 가을 추수와 겨울철에 주로 많이 해놓고 먹었다. 추수한 뒤 비가 오면 곡식은 넉넉하니 떡이나 해 먹고 지낸다 하여 가을비는 떡비라 했다.

그렇다면 떡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속담에 '밥 먹는 배다르고 떡 먹는 배다르다.' '밥 위에 떡'이라 해 밥보다는 떡을 한층 맛있는 음식으로 여겼다. 하지만 우리의 떡은 별식이나 간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관혼상제를 비롯해 주요 절기와 주요 절기와 명절, 고사, 개업식, 이사 때에는 떡을 만들고 나눠 먹었다.

떡은 우리민족에게 단순히 먹거리를 넘어 이웃과 나누고, 정을 나누는 음식이다. 1791년(정조 15) 6월 28일, 순조의 돌날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원자(순조) 돌날 창덕궁 집복헌에 갖가지 장난감을 담은 돌상을 차려놓고 대신과 경재(卿栽)에게 들어와 보도록 했다. 아기가 사유화양건을 쓰고 자주색 비단 겹저고리를 입고 의젓이 앉아서 돌잡이를 했는데 먼저 채색 실을 잡고 다음으로 화살과 악기를 잡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 축하의 말을 하고, 임금은 신하들과 서리, 노비, 군졸, 거리의 백성들에게 까지 떡을 내렸다.('정조실록', '국조보감')

왕실이나 부잣집에서는 출산 후 한이레(7일)마다 수수떡과 소를 넣지 않은 만두를 문 앞에 차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도록 했는데, 이를 '人부심한다'고 했다. 수수떡의 붉은 빛깔은 잡귀를 물리치고, 빈 만두는 아이의 도량이 넓어지라는 뜻이다.

백일에는 '백일잔치'라 하여 아기에게 새 옷을 입히고 흰밥에 미역국을 끓이고 백설기와 수수팥떡, 인절미, 송편 등을 하여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백설기는 백 명이 먹어야 장수한다고 하여 백 집 또는 길에 나가 백 명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는 명을 산다는 뜻으로 명이 길어지라는 뜻이다. 또한 백설기의 '백白'은 숫자 '백百'과 상통하여 100살 즉 장수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백일에는 흰옷과 백설기(흰무리)를 해주었다. 100살 즉 장수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백일에는 흰옷과 백설기를 해주었다.

우리의 떡에는 문화적, 종교적 의미와 함께 한국인만이 갖는 독특한 감정인 정이 담겨 있다.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곧 정을 나누는 것으로,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을 매개하는 특별한 음식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떡은 토착성과 전통성이 가장 큰 음식으로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오늘날에도 지역별로 다양한 떡이 전승되고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2021년 11월 1일 문화재청은 '떡 만들기(Tteok-making)'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그 이유를 보면, 첫째,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ㆍ향유되고 있다는 점, 둘째, 삼국 시대부터 각종 고문헌에서 떡 제조방법 관련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 셋째, 식품영양학 및 민속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학술연구 자료로서 가능성이 크다는 점, 넷째, 지역별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다양한 떡의 제조가 활발할 뿐만 아니라 지역별로도 떡의 특색이 뚜렷한 점, 끝으로 현재에도 생산 주체, 연구기관, 일반 가정 등 다양한 전승 공동체를 통해 떡을 만드는 전통지식이 전승ㆍ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재청은 지정 범위를 떡 만이 아닌 '떡 만들기'와 함께 이웃과 나눠 먹는 전통 생활관습까지 포괄한다고 했다. 특히 떡은 한국인이 일생동안 거치는 각종 의례와 행사 때마다 만들어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나눠 먹는 음식으로,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무형적 자산이다.'떡 만들기'의 국가무형문화재의 지정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떡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사진제공=pixabay /사진제공=pixabay


그동안 우리는 떡을 별식이나 혹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간식으로 먹었을 뿐 떡이 갖는 사회문화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사회문화적, 정(情)문화, 나눔과 배려, 제액초복적인 신앙성까지 담은 소위 'K-떡'은 배고픔을 채우는 별식과 간식의 범주를 넘어 그 이상의 가치와 상징성을 지닌 문화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떡 하나하나에는 상징성과 의미, 스토리가 담긴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떡도 빵처럼 'K-떡'과 같은 브랜드화가 필요하다. 냉장고에 넣어두기만 하면 끝인 빵은 보관하기가 비교적 쉬운 반면, 떡은 냉장고에 넣어두면 쌀의 특성상 쉽게 굳어 제 맛을 잃어버린다. 떡은 보전성의 문제와 짧은 유통기간의 한계로 빵처럼 프랜차이즈로 대중화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무형문화유산의 등재기준 중의 하나가 창조성을 강조하는 만큼 떡도 빵처럼 다변화된 브랜드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정종수 CST 부설 문화행정연구소(ICST) 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 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 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타뉴스 단독

HOT ISSUE

스타 인터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