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왕국'을 '축구의 나라'로... 펠레, 브라질을 바꿨다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2022.12.31 18:23
2005년 한 행사에서 축구공에 입맞추는 펠레의 모습(당시 65세).  /AFPBBNews=뉴스1 2005년 한 행사에서 축구공에 입맞추는 펠레의 모습(당시 65세). /AFPBBNews=뉴스1
브라질은 미국 다음으로 흑인 노예들이 많았던 국가다.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커피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끌려왔다. 이후 브라질은 '커피의 나라'로 급부상했다.


브라질의 흑인 노예들은 1888년 노예 해방령이 선포된 후 서서히 사회 곳곳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야는 축구였다. 흑인 노예들의 후손들이 대거 포진한 브라질 축구 대표팀은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은 1970년 브라질에 세 번째 쥘 리메 컵을 안겼다. 커피 농사를 위해 브라질로 강제 이주당했던 노예의 후손은 이처럼 브라질을 커피왕국에서 '축구의 나라'로 바꿔 놓았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지난 29일(현지시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펠레(1940~2022)가 있었다. 그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18세의 나이로 브라질의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화려한 축구 인생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그는 브라질에 1962년과 1970년 월드컵 우승을 선사하며 브라질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축구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는 명실상부한 '축구 황제'로 등극했다. 월드컵에서 세 차례 우승한 유일한 선수가 됐기 때문이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TV로 전 세계에 경기가 방영된 1970년 월드컵에서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은 아름다운 공격 축구를 선보이며 월드컵의 세계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아프리카 혈통의 선수들이 많았던 브라질 축구는 이때부터 '삼바축구'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그들의 율동적인 드리블이 마치 브라질의 삼바 댄스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1962년 칠레 월드컵 당시 펠레(22세).  /AFPBBNews=뉴스1 1962년 칠레 월드컵 당시 펠레(22세). /AFPBBNews=뉴스1
브라질 축구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펠레를 포함해 무려 6명이 산투스 클럽(브라질) 소속이었다. 산투스 클럽은 브라질 축구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산투스에서 이같은 빅 클럽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커피 무역 때문이었다. 항구도시 산투스는 영국 회사가 이곳에 철도라인을 놓으면서 세계 최대의 커피 무역항으로 성장해 브라질 경제를 이끌었다. 일자리가 많이 생겨난 산투스에서 브라질 노동자들은 영국인들이 여가시간에 즐겼던 축구에 흥미를 갖게 됐고 이후 브라질 축구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산투스 클럽은 브라질 축구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산투스 클럽은 펠레를 비롯한 축구 선수들의 유명세를 활용해 해외 친선경기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였다. 펠레와 산투스는 1972년 한국에 와서도 한 몫을 챙겼다. 한국은 이 초청경기를 위해 1200만 원에 달하는 초청료를 산투스에 지불했다. 축구 팬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이 경기를 중계하기 위한 TV 중계권료도 600만 원에 달했다. 그때 한국에서 쌀 한 가마(80kg)의 가격이 1만 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이런 산투스 클럽의 비즈니스가 가능했던 근본적인 요인은 당시 브라질 축구 선수들의 유럽 이적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펠레도 1960년대 후반부터 유럽 빅 클럽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브라질 군사독재 정권은 펠레는 물론 축구 스타들의 이적을 허용하지 않았다. 브라질 정권에 펠레와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은 브라질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펠레는 1975년에서야 산투스 클럽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프로축구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해 3년간 활약했다.

펠레가 1992년 한 회사의 홍보 촬영을 하고 있다(당시 52세).  /AFPBBNews=뉴스1 펠레가 1992년 한 회사의 홍보 촬영을 하고 있다(당시 52세). /AFPBBNews=뉴스1
축구 선수로 모든 것을 다 이룬 펠레에 대한 찬사는 책 수십 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펠레의 삶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왜 브라질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지 않았냐는 부분이었다. 브라질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펠레가 정권에 굴종했다는 비판이었다.

2021년 발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펠레'에도 이 대목이 거론됐다. 이 다큐멘터리는 펠레를 비겁한 영웅으로만 보기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브라질 군사정권의 폭압적인 정치와 맞서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펠레도 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었겠지만 당시 브라질은 군사정권이 철권을 휘둘렀던 시대라 그의 정치중립적 태도에 무작정 돌을 던지기가 어렵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펠레는 1970년 브라질 좌파 인사로부터 정치범 석방에 힘을 보태달라는 제의를 받았다는 의혹 때문에 군사정권으로부터 조사를 받았고, 이후 그의 행보에는 제약이 있었다.

브라질 빈민가 소년들의 영원한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브라질 흑인 노예 후손들의 우상이었던 펠레는 생전에 "승리하는 데 어려움이 클수록 승리했을 때의 기쁨도 크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축구 경기장에서 그가 이룬 가장 값진 승리는 누가 뭐래도 1970년 월드컵 우승이었다.

하지만 축구장 밖에서 이룩한 가장 행복했던 승리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이제 세상을 떠난 그에게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1995년 그가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이 됐을 때 부패한 브라질 축구 개혁에 박차를 가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완의 성공이기는 했지만 당시 펠레는 오랜 기간 돈과 정치에만 관심을 뒀던 브라질 축구협회를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펠레 시대 이후 '브라질의 최대 수출품은 커피가 아니라 탁월한 개인기를 소유하고 있는 축구 선수'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어쩌면 이 부분이 영원한 '축구 황제' 펠레가 브라질에 안긴 최대 유산일지도 모른다.

이종성 교수. 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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