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넘버원] 심형탁, 도라에몽은 친구-건담은 신

김현록 기자  |  2014.07.29 11:11
사진제공=심형탁 사진제공=심형탁


초등학생 진구는 허약하고 겁 많은 소년이다. 늘 자신을 괴롭히는 퉁퉁이와 비실이 때문에 숨죽여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그에게 동글동글한 고양이를 닮은 '도라에몽'이 찾아온다. 이 미스터리한 녀석은 무얼 해도 안 되는 찌질이 조상님 진구를 위해 그의 후손들이 22세기 미래에서 타임머신에 태워 보낸 로봇. 마법의 주머니 속에서 무엇이든 꺼내놓는 깜찍한 친구 도라에몽과 함께 진구는 달라진다. 그의 삶 또한 달라진다. 심약했던 그의 하루하루가 행복해진다.


도라에몽과 함께 행복해지는 21세기의 소년이 여기 한 명 더 있다. 배우 심형탁(37). '심타쿠'라고 불리는 그는 연예계의 공인된 게임 마니아, 피규어 덕후다. 싸이월드며 미투데이에 사랑하는 장난감, 피규어, 게임 이야기를 공개하기 시작한 게 이미 10년 가까이 된 일. 국내 최대 비디오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루리웹을 뜨겁게 달군 '반도의 흔한 연예인 덕후'의 주인공 '치명타'씨이자, 오로지 출석만으로 레벨 29를 찍은 공인 오타쿠 되시겠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만화와 캐릭터를 두루 섭렵한 그에게도 도라에몽은 각별한 녀석이다. 만남은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 초등학교를 다닌 그의 또래들은 해적판 일본 만화책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곤 했다. 인쇄 질도 좋지 않고 번역도 날림이기 일쑤였지만, 초등학생 심형탁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 접한 세계에 푹 빠지고 말았다.


물론 시작은 시대를 풍미한 명작만화 '드래곤볼'이었다. 당연히 '북두신권'과 '공작왕', '시티헌터'와 '닥터슬럼프'를 섭렵했다. 넉넉하지 않던 시절, 용돈이며 새뱃돈을 아끼고 아껴 500원짜리 만화책을 문방구에서 사 모으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쌀자루에 모아놓은 보물같은 만화책을 '모든 어린 오타쿠의 적' 어머니에게 뺏겨 태우기도 몇 번. 만나고 이별한 여러 만화 주인공들 중에서도 끝까지 남아 곁을 지키고 있는 게 바로 도라에몽과 진구다.

"도라에몽은 정말 만능이에요. 능력이 어마어마하죠. 내가 못 이루는 모든 것들을 만화책에서 대신 해 주더라고요. 이슬이 몸을 투시하는 능력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대나무 헬리콥터를 머리에 꽂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어릴 적 제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모든 것을 얘가 대신 이뤄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새로운 세상이었죠."


어렵게 또 감사하게 도라에몽 잠옷을 구해 입고 잔 날, 그는 만화처럼 2D로 꿈 속에 나타난 도라에몽과 함께 대나무 헬리콥터 날개를 머리에 꽂고 하늘을 날았다.

심형탁이 조심스럽게 취미를 공개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가 넘어서. 싸이월드로 너도나도 미니홈피를 꾸미던 시절, 조심스레 올리기 시작한 사진들도 그 맑은 파랑색의 행복한 도라에몽들이었다. 길을 가다 주차장 셔터에 그려진 도라에몽 그림을 보고 달려가 브이자를 그리며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고, 일본 인형가게에 쌓여있는 도라에몽들 사이에 있고 싶다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건담이며 짱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음 놓고 수집을 시작한 건 3년여 밖에 안 된 일이다. 덕후질엔 엄청난 지출이 따르는 법.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고 작은 배역을 전전하던 신인 배우에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던 2010년 말, 일일드라마 '세 자매'를 마치고 심형탁은 처음으로 고생한 자신에게 선물을 하나 했다. 꿈만 꾸던 PG(퍼펙트 그레이드) 아스트레이 건담을 20만 원 넘게 주고 샀다. 행복했다. 물꼬가 터지자 폭포처럼 봇물이 터졌다. 만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피규어도 샀다. 좋아하는 건담은 사이즈별로 수집했다. 아스트레이 건담은 MG, HG로도 샀다. 물론 도라에몽도. 신기하게 배우로서의 일도 점점 더 잘 풀렸다.

건담 마니아인 박해진과도 그래서 통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2012~2013년 드라마 '내 딸 서영이'를 찍으며 만나서는 틈 날 때마다 건담이며 프라모델, 핫토이 이야기를 전문가 수준으로 나누며 가까워졌다고.

"제가 어렸을 적에 풍족하질 못했거든요. 한이 돼서 그런가 봐요. 돈 벌고 나서부터 원 없이 모으는 거죠. 사실 '뭐 그런 쓸데없는 짓 하냐'고 싫어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하지만 떳떳해요. 덧없이 술 먹고 건강 해치고 지새는 것보다 좋은 취미 아닐까요."

여느 덕후들처럼 사랑스러운 캐릭터, 멋진 건담들은 가지고 놀지 않고, 바라만 봐도 든든하다. 2년 전에 사 두고 '언젠가는 쓰리라' 하며 바라만 보는 에어브러시도 마찬가지다. 그건 단순히 플라스틱에 색깔을 입히는 도구가 아니다. 프라모델을 직접 조립하고 색칠까지 해 생기를 불어넣겠다는 꿈.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에어브러시 박스를 보며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독특한 취미 덕에 더 건강해진 때문일까. 아들의 만화책을 포대째 갖다 버리시던 어머니는 이젠 든든한 응원군이 됐다. 온갖 피규어와 인형들이 가득한 방을 함께 청소하고, 도라에몽이며 짱구 만화를 함께 보는 동료다. 어머니도 '짱구는 못말려'를 안 틀어놓으면 일이 손에 안 잡히신다고. 그런 어머니께 민망했던 순간도 예전엔 있었다.

"한 3년 됐나. 피규어 옷을 갈아입히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여신 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30대 중반의 아들이 인형 옷을 갈아입히고 있으니. 사 놓고 숨겨놨던 거였거든요. 한 10초 아무 말 없이 정적이 흘렀어요. 사춘기 아들이 몰래 야동을 보다 딱 걸린 것처럼. 어머니가 조용히 쿨하게 가셨어요. 그때쯤 체념하신 것 같아요.(웃음)"

하나하나 늘어가는 도라에몽과 건담, 핫토이 피규어와 장난감들 덕분에 그의 집은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 그의 집에 다니러 간 한 지인은 들어가자마자 "이거 무슨 문방구같다"고 탄성을 질렀다.

구석구석마다 크고 작은 인형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은 그 곳은 문 밖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여동생이 선물한 2m 짜리 도라에몽 인형은 안겨 잠을 자기도 한다. 도라에몽 잠옷은 구멍이 나기 직전까지 입고 있다. 지금은 가격도 만만찮은 도라에몽 침구를 노리고 있다고. 어찌나 많은지 도라에몽과 건담 박스를 종류대로 모아 사진을 찍으려고 정리를 하는 데만 4시간이 걸렸다. 몇 시간을 정리하면서 새삼 그간 도라에몽과 피규어, 건담 사랑이 극진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심형탁 스스로도 "어찌 보면 유치하게 보일 수도,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파란 고양이 로보트 인형으로 가득한 그의 집은 심형탁만의 작은 신세계다. 연기자로서 일을 하다 현관 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행복하게 정화를 받는 느낌이란다.

" 저에게 도라에몽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정말 친구 같아요. 힘든 친구의 곁에서 힘이 되는 캐릭터잖아요. 저에게도 도라에몽은 그런 친구예요. 힐링이 돼요. 사람들이 말 못하는 애완견을 보면서 누구에게도 못 하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 위로받기도 하잖아요. 저는 어릴 적 힘들 때 도라에몽을 보고 이야기도 했어요. 눈물도 흘리고요. 지금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함께 통쾌해 하죠. 가끔은 도라에몽이 보살 같다 는 생각도 들어요."

도라에몽과 비견할 만한 다른 친구는 바로 못말리는 악동 짱구다. 도라에몽이 위로와 힐링의 친구라면 짱구는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활력소다. 짱구는 입시 준비 스트레스 속에 살던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난 탓이다. 고요한 독서실에서 '짱구는 못말려' 만화책을 읽다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 내 낄낄거린 적도 있다. 조폭같이 생긴 선생님을 천연덕스럽게 '두목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에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확실한 엄마 아빠 캐릭터 덕에 한 가족의 일상을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단다. 짱구의 통찰력 있는 짧고 굵직한 대사들도 사랑한다.

그렇다면 건담은?

"도라에몽과 짱구는 친구라고 할 수 있지만 건담은 친구는 아닌 것 같아요. 나도 한 번 운전해보고 싶다는 동경이고 로망이죠. 저만 그런 건 아니잖아요. 도라에몽은 가지고 놀지만 건담은 누구나 모시고 살잖아요."

3살, 4살 먹은 조카가 오면 친구 도라에몽과 로망 건담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동글동글 폭신폭신한 도라에몽들은 기꺼이 조카들에게 내어 주고 함께 놀지만 날카롭고도 정교한 마감으로 가득한 건담은 건드려서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될 몸들이시다.

하지만 늘 곁에 함께하는 건 변함없는 미소의 도라에몽들이다. 손때 묻은 미니 동전지갑과 열쇠고리는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다. 부산까지 찾아가 받아 온 닌텐도 사장님의 사인이 담긴 한정판 닌텐도 3DS도 물론 함께.

심형탁이 도라에몽을 좋아하는 건 그 불변성 때문이기도 하다. 1996년 도라에몽의 원작자 후지코 후시오는 숨을 거두며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나는 죽어도 도라에몽은 영원할 것이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그로부터 스무 해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도라에몽은 매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개봉하며 관객을 모으고 있다. 만화책의 판매 부수는 2억 부를 훨씬 넘겼다. 1969년 탄생한 도라에몽과 함께 어른이 됐던 첫 세대들은 이제 아버지가 되고 중년이 되어 아들과 함께 도라에몽을 보러 극장을 찾는다.

심형탁 역시 후지코 후시오의 통찰을, 도라에몽의 불변을 믿는다.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도, 아니 죽은 다음에도 도라에몽은 영원할 거예요.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도라에몽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꿈을 꾸겠죠. 당연히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도라에몽을 함께 볼 겁니다. 미래의 아내까지 좋아한다면요? 그렇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심형탁은 그러나 조심스러워 했다. '심형탁을 보면 도라에몽이 떠올라 드라마에 집중을 못 하겠다'는 시청자 반응을 본 적도 있었단다. 하지만 그가 조심스러운 건 개인적인 아쉬움 때문만이 아니다.

연예계 대표 오타쿠로 보이는 탓에 혹여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하는 탓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괜한 편견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탓이다.

"저도 연기자지만 TV를 보면 오타쿠들은 다 뿔테안경 쓰고 어딘가 이상하고 몸은 왜소하고 그렇게 나오잖아요. 완전히 폐인처럼도 그리고요. 왜 늘 그리 표현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요, 또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요. 게임도 만화도 매일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늘 짬을 내서 조금씩 하는 거예요."

어디로 보나 그는 건강한 오타쿠다. 늘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동화나라 문방구처럼 꾸며진 사랑스러운 집 밖을 나서면 여느 동년배와 다름 없는 사회인이고 믿음직한 연기자다.

하지만 흥미롭지 않은가. 완벽한 수트핏 사이로 얼핏 보이는 동그란 도라에몽의 열쇠고리가. 주머니로 들어간 새파란 동전지갑이. "도라에몽은 나의 소중한 친구"라고 수줍게 고백한 사랑스러운 키덜트, 멜로 드라마의 말쑥한 실장님 전문배우는 쉴 새 없었던 스케줄을 마치고 여간해선 바깥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아주 행복하게. 그는 오늘밤 도라에몽 잠옷을 입고 커다란 도라에몽의 손에 안겨 밀린 잠을 잘 것이다. 도라에몽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으니 그날 밤 꿈엔소중한 파란 친구와 함께 다시 대나무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의 도심 위를 날지도 모르겠다.

글=김현록 기자 roky@mtstarnews.com

사진=이기범 기자 leekb@mt.co.kr, 심형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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