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진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P. 러브크래프트)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입니다. 이 분이 1937년 사망한 이후 지금까지도 ‘불멸의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소설 속 세계에 등장하는 크툴루를 비롯한 설정과 세계관들 때문일 겁니다.
인간이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전 우주를 지배하던 크툴루, 바다 밑에서 잠들어 있는 크툴루의 부활 앞에 인간은 아무런 꿈과 희망도 없는 끝없는 공포를 맛볼 것이라는 일련의 내용들은, 사람들의 상상력과 내면의 공포심을 자극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랑의 연금술사’ 러브크래프트,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_-;
‘크툴루의 부름’이라는 대표작 중 하나이죠. 단편이니 부담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그는 자신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오크몬트라는 도시에 오게 되는데, 이곳은 최근 엄청난 홍수로 물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거의 하루 온종일 비가 내리고 있으며 도시 곳곳은 침수되어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게임 내내 이런 침침한 분위기를 즐겨야만(!) 합니다.
생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작품 곳곳에 유색인종에 대한 모멸적인 표현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으로도 악평이 자자한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으로 만든 게임이라, 게임 시작 시에 당시 배경인 1920년대의 세계에서 흔히 있었던 사실을 없애지 않고 당시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니 게임 유저들의 이해를 바란다는 개발진의 메시지와 함께 이 ‘위태로운’ 게임은 시작됩니다.
게임 속 표현의 일부가 현재 기준으로도 올바르지 않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찰스 리드는 시작부터 엄청난 환각증상과 함께 깨어납니다. 물속에 빠져있는 줄 알고 화들짝 일어난 그는 다행히(?) 어떤 배의 선실 안에 있었습니다. 환각의 원인을 찾은 것 같다는 J. 반 데르 베르그라는 사람과 갑판에서 대화를 마친 주인공은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오크몬트 항구에 떨궈진 채 이 음침하고 흠뻑 젖은 도시를 탐험해야 하죠.
떠오르는 도시(오크몬트), 게임 제목은 싱킹(가라앉는) 시티. 묘한 대조가…
게임은 주인공의 환각증세의 원인규명과 치료, 오크몬트에 숨겨진 비밀을 푸는 것을 메인 퀘스트로 하고, 그 줄기를 따라가며 다양한 오크몬트 주민들로부터 받는 서브 퀘스트를 해결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만 보면 순수 추리 공포 어드벤처 게임이겠지만, 퀘스트의 보상이나 지도의 주요 위치를 탐험하는 것 등으로 얻게 되는 포인트로 주인공은 레벨업을 하게 되고, 이 포인트로 주인공의 능력치를 업그레이드하여 성장, 더 큰 난관과 후반에 나올 미지의 강대한 적(크툴루인가?)들을 대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초반 메인 퀘스트를 이끌어주는 스로그머턴이라는 이 도시의 유력자부터 (H.P.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에 따르면) 뭔가 구린(?) 것이 있는 비 백인입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 게임 그래픽은 그럭저럭 만족하는데, 중간에 등장하는 이런 컷신들의 퀄리티가 심하게 열화되어 있습니다. 2019년 게임이 맞나 싶을 정도…
역시나…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은 다 인간과는 다른 존재, 또는 혼혈인들이더군요.
주인공도 오크몬트 도시인들에게 ‘이방인’이라는 일관되게 배척되는 존재입니다.
싱킹 시티는 앞서도 얘기한 추리 공포 어드벤처 게임이라는 장르 설명에 부합되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발사의 전작들인 셜록 홈즈 게임 시리즈의 요소들도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포함되어 있죠.
퀘스트들은 대부분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고(주로 살인입니다), 탐정인 주인공인 추리능력을 바탕으로 각종 증거를 수집하고 사건의 흐름을 추리하여 해결하는 흐름입니다. 찰스 리드의 추리를 뒷받침해주는 그만의 특수 능력은, ‘마음의 눈’, ‘역행 인지’라고 이름 붙여진 시스템들로 표현되는데, 사건 현장에서 수집한 증거 중 특정한 포인트에서 마음의 눈을 작동시켜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있고, 범인(들)이 남긴 증거들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을 시각화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인 역행 인지로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어딜 가면 이런 능력을 배울 수 있습니까?
‘크라임 & 퍼니쉬먼트’, ‘악마의 딸’ 등을 해본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역행 인지와 자료 수집으로 퍼즐을 하나씩 짜맞춘 후 마인드 팰리스에서 사건의 흩어진 요소들을 이어나가 최종 결론에 도달하면 범죄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범인에게 냉정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놔두느냐, 아니면 자비를 베푸느냐 하는 선택은 게이머의 몫입니다. 일단 게임 초반 사건들은 범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어떤 힘에 의해 일어난 환각으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들이므로 자비를 베풀 여지가 있을 겁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미지에 수정을 좀 했습니다.^^
‘죽은 크툴루가 르리예의 거처에서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는 소설의 문장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면서 말이죠.
취향과 인내심 사이에서 드는 고민들
싱킹 시티는 모든 게이머들에게 권할 만한 게임은 아닐 겁니다. 우선 공포물에 대한 면역이 좀 필요할 테고, 특히 러브크래프트를 사랑하는 분들이나 크툴루 신화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있는 게이머라면 패스하지 말고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나, 초반 스토리 전개는 확실히 어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원래 추리물을 좋아하는 게이머들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게임의 주인공을 마치 빙의한 셜록홈즈 정도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게임 시스템이나 콘텐츠에 이전 셜록 홈즈 게임의 요소들을 계승해 넣어놨기 때문에 크툴루 신화에 대한 짙은 향기만 빼면 셜록 홈즈 후속작인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에요(물론 이전 프로그웨어의 셜록 홈즈 게임에도 크툴루 신화와 관련 있는 작품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역시 비밀은 바다속에…
한국어화가 되지 않았다면 더더욱 해보기 어려웠을 게임이라 한국어화는 반갑기만 합니다. 추리물이기 때문에 번역에 심한 오류가 있다면 문제일 텐데, 이런 부분도 초반에 발견한 몇 가지 오타 등을 제외하면 크게 발견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게임의 UI나 정렬방식 등의 문제가 더 두드러졌습니다. 해결된 퀘스트에 메인과 서브가 그냥 해결된 순서대로 쌓여있어 직관적으로 보기가 힘들고, 사건집에 점차 쌓이는 단서들도 어떤 인과관계 없이 나열될 뿐입니다.
맵도 지나치게 넓은 데다가 곳곳이 침수되어 있어 보트로 이동해야 하는데, 맵의 구역 포인트마다 빠른 이동 포인트가 있지만 수가 적은 편이고 꼭 방문해야 할 지점에 대한 힌트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달려가고, 배 타고, 곳곳을 헤집어 다니면서 건물 안으로 꼭 들어가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등 지도 탐험이나 이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했습니다. 스프린트 등 빠른 달리기도 지원하지 않으니 더 답답합니다.
맵 전체는 굉장히 넓습니다.
달리기와 보트 타기의 반복… 지루합니다 솔직히.
또 아직 크툴루 신화, H.P. 러브크래프트 문학의 진면목을 접해보지 못한 게이머들도 이번 기회에 러브크래프트 홀릭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알 수 없는 유물… 이 안의 초록색마저 러브크래프트의 묘사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