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 감독. /사진=대한축구협회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은 "다음달 월드컵 예선 두 경기를 맡을 임시감독으로 황선홍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선임하기로 했다. 더불어 6월에 있을 월드컵 2차 예선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적어도 5월 초까지는 정식감독을 선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과거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 협회에서도 A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을 겸임한 사례가 있다. 황 감독은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성과를 보여줬으며, 국제대회 경험과 아시아 팀들에 대한 이해도를 갖췄다"고 선임 배경을 설명했다.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 /사진=뉴시스
황선홍 감독. /사진=뉴시스
다소 혼란스럽고 어수선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3월 A매치 기간에 올림픽 대표팀은 사우디아라비아 담맘에서 열리는 친선대회에 출전한다. A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의 일정이 겹친다. 황 감독은 동행할 수 없다. 황 감독 없이 기존 U-23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올림픽대표팀을 이끌어야 한다. U-23 대표팀도 '임시 체제'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황 감독은 A대표팀에서 별도의 코칭스태프를 꾸려 다음달 18일 선수단 소집부터 26일 태국과 북중미 월드컵 2차 예선 원정 4차전까지 맡게 된다. 그 뒤 곧바로 U-23 대표팀으로 돌아가 10회 연속 올림픽 진출을 위해 '파리 올림픽 준비 체제'에 돌입한다.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총 16개국이 참가해 4개국씩 네 조로 나눠 치르는 U-23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 우승 후보 일본을 비롯해 중국,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B조에 편성돼 있다. '죽음의 조'다. 여기서 조 2위까지 올라가는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한 뒤 최종 3위 안에 들어야 파리 올림픽 본선 직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 4위는 아프리카 예선 4위 기니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 마지막 한 장의 본선 진출권을 놓고 '끝장 승부'를 펼쳐야 한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신태용 감독. /사진=OSEN
어느 종목이나 비슷하겠지만, 한국 축구에서도 임시 감독은 위기 상황에서 자주 등장한다. '정식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이나 특정 이벤트 경기를 갖는 시기에 일시적으로 팀을 맡는다. 때로는 '감독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식'이 아니고 '임시'로 팀을 맡는다는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축구에서 '임시 감독'의 가장 최근 사례는 10년 전인 2014년 9월 2일부터 8일까지 딱 1주일 동안 A대표팀을 지휘한 당시 신태용 감독대행(현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이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던 홍명보 감독(현 울산 HD 감독)이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비판 여론에 시달린 끝에 사퇴한 뒤였다. 신태용 감독대행은 당시 차기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낙점됐고 새 감독이 자리에 앉기 전의 일시적 공백기에 임시 사령탑을 맡아 베네수엘라, 우루과이와 두 차례 친선경기를 지휘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9월 5일 베네수엘라와 친선경기에 앞서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지만 선수 파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휘를 미뤘고, 고양종합운동장 관중석에서 우루과이전을 지켜보면서 취임 인사만을 했다. 그 뒤 곧바로 슈틸리케 감독 체제로 들어가 2015 호주 아시안컵과 동아시안컵,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 등을 치렀다. 슈틸리케 감독의 공식 재임기간은 2014년 9월 24일부터 2017년 6월 15일까지였다.
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사진=AFPBBNews=뉴스1
그보다 앞선 '임시 감독' 사례는 다시 1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4월 20일부터 6월 15일까지 2개월 동안 대표팀을 맡은 박성화 감독대행이다. 성적 부진으로 물러났던 움베르토 쿠엘류 감독(2003년 2월 3일~2004년 4월 19일)과 조 본프레레 감독(2004년 6월 24일~2005년 8월 23일) 사이의 '임시 감독'이었다. 박 감독대행은 당시 파라과이, 터키와 두 차례 친선경기에 이어 2006 독일 월드컵 예선 베트남전을 이끌었다.
그 다음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거스 히딩크 감독(2001년 1월 1일 ~ 2002년 6월 30일)이 물러난 뒤 그 해 11월 가진 브라질 초청 친선경기만을 위해 대표팀을 맡은 김호곤 '임시 감독'이다. 11월 3일부터 20일까지 '18일간의 임시 사령탑'이었다.
박항서 감독. /사진=뉴시스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는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고 김평석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멕시코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하석주가 선제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태클 퇴장'을 당하면서 수적 열세를 안고 1-3으로 역전패한 데 이어 네덜란드와 2차전에서는 0-5로 참패를 당하자, 차범근 감독은 중도 경질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어 김평석 감독대행 체제로 치른 벨기에와 3차전은 후반 27분 유상철의 동점골에 힘입어 1-1로 비겼고,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던 1995년(4월 26일~7월 31일)과 1996년(2월 15일~1997년 1월 7일) 사이에는 무려 3명의 '임시 감독'이 계속해 나왔다. 박종환 감독이 1995 코리아컵 4강에서 탈락하고 국가대표 선수들의 음주 비난 여론을 꺼내면서 선수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사퇴한 뒤 국내 지도자들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고사하는 비상 사태가 이어졌다. 3연속 임시 감독 선임의 배경이다.
허정무 전 감독. /사진=뉴스1
# '임시 감독' 원조는 1948 런던 올림픽의 이영민 감독
한국 축구 역사에서 A대표팀 사령탑으로 가장 앞 자리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박정휘(1908~1985) 감독이다. 박정휘 초대 감독은 경성제대(서울대 전신)에서 라이트백(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며 만주 원정경기를 치렀고 주장을 맡기도 했다. 1945~1947년 하경덕 회장의 5, 6대 집행부 시절부터 1950년대 말까지 조선축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의 이사로 여러 차례 일했고, 1954~1955년 대한축구협회 이사장, 1957~1959년 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대 중반에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축구 행정에 관여했다.
그는 한국대표팀이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 무대에 출전한 1948년 런던 올림픽(7월 29일~8월 14일)을 앞두고 그해 6월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한국은 그해 5월 21일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뒤 런던 올림픽을 준비했다. 그러나 박정휘 감독은 런던 올림픽에 참가지 못하고 출국을 눈앞에 두고 사퇴해야만 했다. 한국 축구선수단은 감독 없이 장도에 올랐다.
사연은 이랬다.
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멕시코와 경기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대한체육회는 박정휘 감독을 제외하고 16명의 선수단만 출국할 것을 지시했다. 선수단은 기차를 타고 출발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간 뒤 다시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중국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친선경기를 한 차례 치른 뒤 항공편을 이용해 런던으로 들어갔다. 감독 없는 축구대표팀의 비상 상황에, 한국 올림픽 선수단 본부는 이영민을 '임시 축구감독'으로 임명했다. 한국 축구 역사에서 사실상의 첫 '임시 감독'이다.
아마추어 야구 최고 타자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으로 잘 알려진 '야구의 전설', 바로 그 '이영민'이다. 이영민(1905~1954)은 1928년 경성운동장(동대문야구장) 개장 이후 첫 홈런의 주인공으로 한국 야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강타자이면서, 축구선수와 육상선수로도 이름을 떨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배재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에서 축구 선수로 뛰며 전조선축구대회 우승에 앞장섰고 1930년 경평축구 정기전에 공격수로 나서 골도 넣었다. 1933년에는 경평전에서는 경성축구단 감독을 맡았다. 또 1928년 전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는 5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33년 박승빈 조선축구협회 초대 회장의 제1대 집행부 시절부터 이사로 일하며 초창기 축구 행정에도 관여했다.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이영민은 야구협회의 시찰단 자격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다가, 뜻하지 않게 공석이던 한국 축구대표팀의 감독을 맡게 됐다. 한국 대표팀은 '원조 임시 감독' 이영민의 지휘 아래,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최성곤 배종호 정국진(2골) 정남식의 골을 묶어 5-3으로 이겨 사상 첫 A매치에서 첫 승을 챙겼지만, 스웨덴과 8강전에서는 0-12로 대패했다. 스웨덴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한국과 스웨덴의 경기 장면.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