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어 레버쿠젠 선수들. /AFPBBNews=뉴스1
한때 차범근과 손흥민이 활약해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레버쿠젠의 별명은 '네버쿠젠(Neverkusen)'이다. 분데스리가 우승 문턱에 다가간 적은 꽤 있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 무릎을 꿇어 생겨난 자조 섞인 별칭이다.
'네버쿠젠'의 오명은 2000년대 초반 유럽에 널리 회자됐다. 2000년 레버쿠젠은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무승부만 해도 분데스리가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대표하는 독일 축구 스타 미하엘 발락(48)이 운터하킹과 경기에서 자책골을 기록해 우승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2년 뒤인 2002년 레버쿠젠은 다시 한 번 분데스리가 우승에 도전했다. 리그 3경기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레버쿠젠은 2위 도르트문트에 승점 5점 차이로 앞서 있었다. 하지만 레버쿠젠은 이후 두 경기를 패해 나머지 경기에서 3전 전승을 거둔 도르트문트의 우승을 물끄러미 지켜봐야 했다.
레버쿠젠은 같은 해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도 레알 마드리드에 패했고 독일 FA컵인 DFB 포칼 결승전에서도 샬케 04에 무릎을 꿇었다. 흥미롭게도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독일 대표팀에는 5명의 레버쿠젠 소속 선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도 독일은 결승전에서 브라질에 패했다.
레버쿠젠 선수들이 12일(한국시간) 유로파리그(UEL) 8강 1차전 웨스트햄과 홈 경기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레버쿠젠은 빠르면 이번 주말 리그 29라운드 경기에서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레버쿠젠은 이미 DFB 포칼 결승전에 올라 있고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4강 진출에 다가섰다.
레버쿠젠은 어떻게 유럽 최고 수준의 축구 클럽이 된 걸까. 레버쿠젠은 한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는 팀이 아니다. 여러 선수가 득점과 어시스트를 나눠 기록하는 매우 조직적이고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는 팀이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은 레버쿠젠의 또 다른 별칭인 '베르크스엘프(Werkself)'와 안성맞춤이다. 베르크스엘프는 직역하면 '공장의 11명'이라는 뜻이다. 1904년 바이어 제약회사가 공장 근로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든 축구 클럽이 레버쿠젠이기 때문이다.
사비 알론소 레버쿠젠 감독. /AFPBBNews=뉴스1
하지만 레버쿠젠은 이 제도에서 예외적인 클럽이다. '50+1' 규정이 제정되기 훨씬 이전에 바이어를 모기업으로 해 탄생한 레버쿠젠은 그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았다. 그래서 레버쿠젠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수많은 공장에서 탄생한 축구 클럽의 상징적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과감한 패스로 시작되는 레버쿠젠의 공격 축구는 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사비 알론소(43)의 영향도 컸다. 스페인 축구 황금시대를 열었던 수비형 미드필더 알론소는 레버쿠젠 선수들에게 항상 적극적인 패스 게임을 주문했고 이런 공격적 성향이 팀을 바꿔 놓았다.
레버쿠젠 스타일의 공격 축구를 이끌고 있는 선수는 여러 명 존재한다. 굳이 2023~2024시즌 레버쿠젠 열풍의 주역으로 한 명만 꼽자면 단연 플로리안 비르츠(21)다. 그는 최근 침체에 빠져 있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미래로 손꼽히는 미드필더다.
레버쿠젠의 플로리안 비르츠(가운데).
여기에는 학업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2017년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 당시 축구 신동으로 불렸던 하베르츠가 출전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학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이 학업을 통해 '생각하는 선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레버쿠젠 클럽의 철학이기 때문이었다.
이종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