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크로우. /사진=KIA 타이거즈
최근 KIA를 보면 그들의 응원 구호 '최강 기아'에 걸맞게 기세가 대단하다. 곧 리그 30경기를 치르는 시점에서 KBO 10개 팀 중 유일하게 10패 미만을 기록했다. 이번 주 고척 키움전에서는 2021년 4월 6일~ 4월 8일 고척 원정 3연전 이후 1113일 만에 싹쓸이하며 20승(7패)을 선점했다. 이는 1993년 해태 시절 20승 8패, 2017년 20승 8패로 28경기 만에 20승에 도달했던 구단 기록을 한 경기 더 앞당긴 신기록이다.
신기록 작성에 앞선 양현종(36)은 "시즌 초반 승패 마진을 이렇게 벌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어 팀 분위기는 너무 좋다. 언제든지 질 것 같지 않다"고 최근 KIA의 분위기를 대표해 전했다.
팬들로부터 그런 KIA의 약점 내지 활약이 아쉽다고 지적받는 선수가 크로우다. 크로우는 25일 경기 종료 시점에서 6경기 4승 1패 평균자책점 2.61, 31이닝 31탈삼진을 기록 중이다. 평균자책점 3위, 다승 1위, 탈삼진 1위로 리그 수위급 성적에도 나오는 아쉬운 소리는 언뜻 듣기엔 배부른 투정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시선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크로우의 이닝 소화력이다. KIA는 25일 경기 종료 시점으로 퀄리티 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10회로 리그 공동 4위에 머물러 있다. 살펴보면 제임스 네일(31)과 양현종(36)이 각각 4회, 크로우는 윤영철(20)과 함께 1회씩 기록 중이다. 1선발 다운 구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기도 다소 애매하다. 3월 2경기서 평균자책점 8.1로 불안했고 4월에도 4경기 연속 비자책 피칭을 이어가고 있으나, 시즌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이 1.26으로 다소 높다.
크로우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도 한몫했다. KBO 구단 관계자들로부터 크로우는 지난해 어깨 부상으로 인한 메이저리그 구단의 의구심이 아니었다면 KIA가 못 데려왔을 선수로 평가받았다. 키 185㎝, 몸무게 108㎏의 큰 체격에서 나오는 최고 시속 153㎞의 강속구를 주 무기로 오랜만에 제구가 뒷받침된 폭발적인 구위를 기대할 수 있는 에이스감으로 여겨졌다.
윌 크로우. /사진=KIA 타이거즈
제임스 네일(앞)과 윌 크로우(뒤). /사진=KIA 타이거즈
기대와 달리 불안한 크로우에 비해 당초 안정적인 유형의 2선발로 평가받던 팀 동료 네일이 5경기 4승 무패 평균자책점 1.14, 31⅔이닝 35탈삼진, WHIP 0.92를 기록하고 있어 더욱 비교됐다.
크로우가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50.8%로 너무 낮다. 리그 평균이 58.1%, 투수진 막내 윤영철조차 60.7%로 일단 스트라이크부터 잡고 유리한 볼 카운트에서 타자들과 싸움을 시작하는데 크로우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KBO 타자들에게 통할 만한 직구 구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스트라이크 존 경계를 두들기고, 몰렸을 때 콘택트 능력이 좋은 타자들에게 커트 당하다 결국 안타를 맞는다.
23일 고척 키움전도 그런 경기 중 하나였다. 이날 크로우는 5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키움 타자들에게 안타 7개와 볼넷 1개를 내주며 고전했다. 그 류현진(37·한화 이글스)에게도 7타자 연속 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콘택트 좋은 타자가 많은 키움이다. 키움 타자들은 크로우의 피칭을 오래 지켜본 뒤 가끔가다 빠지는 변화구를 공략해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냈다. 직구를 때려 잘 맞은 타구가 나온 건 1회말 로니 도슨의 안타 하나뿐이었다.
이 점에 대해 정재훈 코치도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 코치는 "크로우에게 다른 건 요구하지 않았다. 딱 하나, 스트라이크 비율을 높여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크로우가 적극적인 승부를 펼치지 못하는 이유를 두고 아직 자신의 공을 믿지 못하는 것과 실점을 내주지 않으려는 선발로서 책임감을 이야기했다. 정 코치는 "크로우는 너무 1부터 9까지 자신의 가진 공을 모두 보여주려 한다. 또 실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책임감이 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크로우는 충분히 위력적인 공을 가지고 있고, 자신 있는 공, 상대에게 통하는 공만 던져도 성공할 수 있다. 이 점을 크로우에게도 꾸준히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KIA 정재훈 1군 투수코치(가운데 뒤)가 지난 2월 호주 스프링캠프에서 윌 크로우(가운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KIA 타이거즈
실제로 크로우는 한국 야구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 기준 포심 패스트볼(28.1%), 스위퍼(20.1%), 체인지업(18.8%), 투심 패스트볼(16.1%), 커터(13.7%), 커브(3.1%)로 무려 6가지의 공을 던진다. 그중에서도 피안타율은 스위퍼 0.154, 포심 패스트볼(직구)은 0.226, 커터 0.235로 타자들이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메이저리그에서도 직구를 제외한 모든 구종이 헛스윙률 22%를 넘었던 선수다. 최고 시속 153㎞의 직구 역시 메이저리그에서는 평범하지만(헛스윙률 8.3%), 리그 평균 구속이 시속 145㎞ 근방인 KBO리그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크로우 스스로 공에 확신을 주기 위해 KIA 구단 내에서도 꾸준히 말과 행동으로 믿음을 주고 있지만, 아직 쉽게 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 코치는 이 역시 이해했다.
정 코치는 "여기서(KBO)는 그 정도까지 정성들여 피칭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한 구, 한 구 신경 써서 던져야 했을 것이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걸 빨리 깨쳐야 한다. 예를 들어 네일의 경우 자신의 스위퍼에 타자들이 헛스윙하는 걸 눈여겨봤다고 했다. 그다음에 다른 타자에게 또 한 번 같은 코스에 던져봤더니 또 못 쳤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네일의 성적이 좋은 이유 중 하나를 귀띔했다.
그러면서 "이것도 리그에 적응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크로우도 바뀌고 싶을 텐데 아무래도 수년간 경험해온 것이 있다 보니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도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실점 없이 막아내고 좋은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감쌌다.
윌 크로우(왼쪽)와 한승택이 어깨동무를 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KIA 타이거즈
피츠버그 시절 윌크로우. /AFPBBNews=뉴스1
크로우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 커리어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려 3번의 신인드래프트를 거쳐 프로 무대에 발을 디뎠고,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기까지 3년의 세월이 걸렸다. KBO리그로 오는 여느 외인처럼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고 가길 반복했고 결국 빅리그 10승 21패 평균자책점 5.30의 기록을 남기고 방출됐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은 크로우의 활약을 조명하며 "크로우는 젊은 피츠버그 클럽하우스에서 친화력 좋은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통계에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팀 케미스트리와 문화에 크게 기여하는 특성"이라며 데릭 셸턴 전 피츠버그 감독의 말을 함께 소개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피츠버그를 떠날 때는 SNS를 통해 장문의 인사를 남겨 많은 피츠버그 팬과 동료들의 축복을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여전했다. 투수 등판일이라 예민한 상황에서도 더그아웃을 지나다닐 때마다 환하게 인사를 하는 선수 중 하나가 크로우다. 지난 17일 최정(37·SSG)을 맞혔을 때는 이닝이 종료되자 계속해서 SSG 더그아웃을 향해 미안함을 전했고, 경기 종료 후에도 더그아웃을 서성이다 직접 취재진 앞에서 사과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25일 양현종의 170승 기념 물 세례 때는 네일과 함께 물통을 뒤늦게 나왔다가 애매해진 타이밍에 뻘쭘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 크로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정 코치이기에 믿음은 굳건했다. 정 코치는 "크로우도 시범경기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우리 외국인 투수들에게 지금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앞으로 더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활짝 웃었다.
윌 크로우. /사진=KIA 타이거즈
윌 크로우. /사진=KIA 타이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