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원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영화 '폰'의 안병기 감독
지난 22일 MBC 수목드라마 '아일랜드'에 주인공 이중아(이나영)의 휴대폰 번호가 노출돼 번호 주인이 곤욕을 치렀다.
방송 직후 '아일랜드' 시청자 게시판에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화와 문자가 폭주한다. 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야하냐"는 한 시청자의 항의가 올라왔다.
비단 '아일랜드' 뿐만 아니다. 지난해말 40%대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SBS '천국의 계단'에서도 권상우의 휴대전화에 뜬 최지우의 번호가 충북 청주에 거주하는 한 자영업자 김모씨의 번호와 일치, 역시 전국에서 쇄도하는 전화와 문자메세지 때문에 업무가 마비되는 곤경에 처했다.
남의 일로만 치부하기에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는 상상 이상일 수 있다. 무심코 사용한 무작위의 번호가 해당 번호 소유주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될 수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등장했던 전화번호는 결국 한 여고생의 것으로 밝혀져서 제작진이 그 번호를 구입하기도 했다.
공개된 전화번호로 한번쯤 전화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 대중들의 호기심 어린 심리. 이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 제작진은 제작진에게 부여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올초 방송됐던 KBS2 '낭랑 18세'의 경우 극중 한지혜가 불러주는 이동건의 휴대폰 번호는 제작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팀폰'의 번호. 당시 조연출을 맡았던 노상훈 PD는 "방송 후 5초마다 한번씩 전화가 왔다"며 "2002년 KBS2 드라마 '러빙 유'에 썼던 '팀폰'은 결국 쇄도하는 전화로 고장나고 말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MBC '나는 달린다'에서 탤런트 김정현이 연락처를 건네주는 장면에서 매니저의 번호를 노출해 역시 매니저가 전화에 시달렸고,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도 뺑소니 목격자를 찾는 플래카드에 이용한 스태프의 전화번호로 하루 수십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극의 리얼리티를 위해 '실제 존재하는 듯 보이는' 전화번호를 쓸 수밖에 없는 제작진은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만약의 사태를 무시할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자신들의 전화번호를 사용하곤 한다.
011-9998-6644 라는 '전화번호'가 소재가 된 공포영화 '폰'의 안병기 감독은 아예 자신의 번호를 사용해 골치아픈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작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신(神)에게 통하는 직통번호로 호출기에 찍힌 776-2323번 때문에 영화가 개봉한 지역마다 같은 전화번호를 소유한 이들이 밤낮없이 걸려오는 전화와 전쟁을 치르기도했다.
결국 제작진은 555-0123으로 전화번호를 바꿔넣었다.
실제 미국 통신회사 벨코어사는 555-0100에서 555-0199까지 전화번호 100개를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픽션' 용으로 빼놓았다. 영화 뿐 아니라 TV, 라디오, 노래 등 각종 창작물에서 가상 전화번호를 쓸 때 반드시 555국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써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한국에서도 정보통신부의 지정 하에 특수서비스 용도로 남겨놓은 번호가 있다. 현재 이동전화 5개사의 경우 특수국번 가운데 200국번과 700국번을 각각 자동응답시스템(ARS)와 음성정보 서비스로 이용하고 있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이를 적절히 사용한 예. 영화 포스터에 공개된 011-200-0207번으로 영화 홍보를 했다. 걸려오는 전화 덕분에 이용료도 톡톡히 건졌다는 후문이다. 제작용 PPL의 가능성도 담보하고 있다.
늘어만 가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 국제 무대로 커져만 가는 한국 영상 시장의 행보와 발맞춰, 불특정 개인의 피해를 사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픽션용 전화번호 사용'은 적극 수용의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