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이태현, 쓸쓸한 9월의 씨름판

배성민 기자  |  2006.09.13 17:18
황태자 이태현과 아시아의 역사 이민우. 이들은 10여년의 세월을 사이에 뒀지만 한때나마 씨름계를 풍미했던 장사들이다. 이들이 올해 9월 나란히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다가왔다.


이태현은 격투기인 프라이드에 진출 11일 데뷔전을 치렀지만 상대의 맹공에 기권, 퉁퉁 부은 얼굴로 언론 앞에 나섰다. 그리고 이민우는 지난 9일 간경화로 영원히 세상을 등졌고 13일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몇 가지 더 있다. 두 가지 종목(이태현-씨름.격투기, 이민우-역도.씨름)을 오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 종목에서는 비할 수 없는 영광을 얻었지만 다른 쪽에서는 이전과 같은 승리감(적어도 현재까지는)을 맛보지 못 한 점도 같다.


42살의 젊은 나이로 숨진 이민우는 '1980년대 아시아 최고의 역사'에서 씨름꾼으로 변신, 화제를 모았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역도 무제한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이민우는 이듬해 3월 전격적으로 씨름선수 전향을 선언했다. 계약금 4000만원, 연봉 2000만원의 조건은 양친이 사망, 형제끼리 어렵게 살아온 그에게 단비와 같은 기쁨이었다.

그 뒤 돈 때문에 태릉선수촌을 뛰쳐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체육애호가인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돈보다는 최고의 선수자리를 선택했다는 말이 맞다는 것이 중론이다. 바벨을 들어올리는 아시아의 역사에서 상대를 번쩍 들어 메다꽂는 천하장사로의 변신을 꿈꾼 것. 전향 직전에 한 방송사 프로에서 그에게 한 씨름선수와의 씨름대결을 주선했고 이민우는 바벨을 들어올리던 호기로 호각세를 이뤄 자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민우는 아시아의 역사긴 했지만 올림픽에서는 동메달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시 세계기록과 이민우의 최고기록은 무려 60㎏이나 차이가 났다. 그리고 그에겐 시련이 다가왔다. 한 동안 입단하기로 했던 씨름구단에서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30㎏의 거구임에도 이민우는 병역특혜마저 취소돼 방위병 소집영장이 발부됐다.

6개월여의 낭인 생활끝에 그에 대한 동정론이 형성되며 결국 샅바를 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천하장사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95년까지 8년여의 씨름선수 생활 동안 그는 221전 114승 107패의 괜찮은 기록을 남겼지만 금메달(장사)를 딸 수는 없었다. 백두장사 2위와 천하장사 4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이태현은 이민우가 씨름선수로서 좌절감을 뼈저리게 느끼던 93년 프로씨름판을 처음 밟았다. 10여년 동안 그는 화려한 기술로 3차례나 천하장사에 올랐고 백두장사 타이틀도 18번이나 차지했다. 데뷔 첫해부터 지난 8월까지 630경기에 나서 472승158패(승률 74.9%)를 기록하며 최다승의 기록보유자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8월 종합격투기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했고 배신자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한달여만에 모래판이 아닌 사각의 링에 오른 그는 천하장사가 아닌 패배자로 링을 내려왔다. 1회 TKO패라는 초라한 결과를 뒤로 한 채로.

이민우가 그토록 오르고 싶어했던, 이태현이 마지못해 떠나야 했던 모래판은 여전하지만 선수들은 그 주위를 떠돌고 있다. 태권도와 함께 국기(國技)로 꼽혔던 씨름은 팀은 사라지고, 스타들은 떠나고, 팬들의 관심은 사라지는 속에서 치열한 내부 분열마저 일어나고 있다. 이태현 이전의 씨름판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영원한 천하장사로 군림하던 이만기는 씨름연맹으로부터 영구 제명됐다. 이민우의 빈소에는 씨름계의 동료가 아닌 역도선수 시절의 친구들만 분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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