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가면 김정은은 비비안, 박신양은 카를로스, 이동건은 마틴이 된다. SBS '파리의 연인'이 현지 방영되면서 태영, 기주, 수혁이라는 배역 이름을 현지화했기 때문이다. 한때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 실정에 맞게 라틴계 이름과 세례명을 쓴 것.
이 같은 이름 현지화가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유행이다. 국내 방영중인 외화시리즈로 친숙해진 등장인물들의 배역명을 우리식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원작 이름 그대로 나오고 있지만, 팬들은 이를 한국식으로 음차해 친근하게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폭스TV 시리즈물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 분)의 성을 '석호필'로 부르고 있는 것.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데다가 아이비리그를 나온 지적인 배우 덕에 '석호필'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극중 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변호사로 나오는 베로니카 도노반(로빈 튜니 분)은 '베변'이라 지칭된다. 여기서 '변'은 변호사의 준말로 흔히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름의 맨 앞자를 성처럼 이용해 한국식으로 지칭한 것.
케이블채널 OCN을 통해 방송되고 있는 폭스TV의 '하우스(House M.D.)'의 주인공은 '하 박사'로 불리고 있다. 천재적인 분석능력을 갖춰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괴짜인 의사 하우스(휴 로리 분)의 이름 앞글자를 한국식 외자 성처럼 따 부르고 있다.
역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CBS TV 시리즈물 'CSI : 과학수사대'의 초대 반장 길 그리섬(윌리암 L. 피터슨)의 한국식 애칭은 '고이선'. '길 반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히딩크와 닮은 외모에 그의 리더십과 비견되며 국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됐다.
뒤를 이은 시리즈 'CSI : 마이애미'편에서 마이애미 범죄수사국장을 맡은 호레이쇼 케인(데이빗 카루소 분)은 '호 반장'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이렇게 외국인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차해 부르는 것은 역사가 깊다. 개화기 한국에 온 해외 선교사들의 이런 식의 이름을 가졌다. 석호필이라는 이름도 3.1운동에 적극 협력한 영국 출신의 의학자이자 선교사인 프랭크 W.스코필드의 한국식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런 식의 사례는 많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영국 태생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원두우, 스웨덴에서 온 최초 구세군 여성 선교사 코흘러는 고월라 등의 한국이름을 썼다. 한국에 귀화한 종교인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음차 이름을 쓰는 이들이 많다. 4대째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는 린튼 집안은 여전히 '인'이라는 성과 한국식으로 음차한 이름을 쓰고 있다.
한편 광주에서 머물고 있는 프랑스인 수녀 비르지니 씰바는 특이하게 '훈차' 이름을 쓰고 있다. '씰바'는 '숲'을 뜻하기에 이에 해당하는 한자 '임'을 성으로 쓰고, 이름은 '비르지니'의 본 뜻을 그대로 따 '순수'를 쓰고 있다.
음차든 훈차든, 이런식의 이름 바꿔 부르기가 외국인을 더욱 친근감 있게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해외 스타에게 한국식 이름을 붙여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