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려고 연기" 지진희의 유쾌한 본색

김현록 기자  |  2007.01.01 06:04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저 혼자 신나게 사랑하는 것이 미안해 연인을 버리고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던 사내. 행복한 미소 가운데서도 시대의 우울을 결코 버리지 못했던 남자.


황석영 작가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오래된 정원'(감독 임상수·제작 MBC프로덕션)의 남자주인공 오현우에 지진희가 캐스팅됐을 때 네티즌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 우울하고도 고지식한 주인공 오현우에게 강직한 인상의 지진희가 어울린다 손을 들어줬던 이들이 절반쯤, 나머지는 오현우의 무게가 표현될 수 있겠느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지진희는 보란듯이 해냈다. 아작아작 총각김치를 씹다 눈물을 뚝 떨어뜨리는 그를 보면서 "어떻게 할까 싶었다"는 임상수 감독마저 "소름끼치는 순간이 있더라"고 고백할 정도니. 오현우의 그늘을 벗고 행복한 아버지이자 남편인 배우 지진희로 돌아와 만난 그는 마음놓고 신나게 영화와 삶을 이야기했다.


-영화를 본 소감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영화를 본 어르신들이 우시는 걸 보며 나는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는 기억하지 않을 먼 이야기를 보며 가슴시린 감정을 느끼셨나 보다. 부모님들도 재미있게 보시겠구나 싶더라.


-오현우는 시대와 민감하게 호흡하는 인물이다. 당신의 학생시절은 어땠나?

▲오현우에 대해 나약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 모두가 그랬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나는 오현우보다는 (여주인공) 한윤희처럼 지냈다고 할까. 관망자적인 자세였다. 80년대는 아니고 90년대였는데, 그림 그리고 농구하러 다니는 게 저의 전부였다. 공예를 전고하다 대학 때문에 디자인을 전공했었다. 그게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대쉬하는 애들도 많았는데 어쩜 연애는 도통 관심도 없었고 미팅도 한번 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렸던 거다. 사실 아직도 어린 구석이 있고.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임상수 감독도 칭찬하더라. 기대 이상이었다면서.

▲의리의 돌쇠 이런 이야기는 안하셨나?(웃음) 굉장히 즐겁게 찍었다. 그 시작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부터였다. 그전에는 고통스러웠다. 매일 '이거 언제 끝나나' 생각이나 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뭔가를 해내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영화에 그저 어우러져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만족한다. 저의 존재가 이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는 연기자로서, 이제 시작이다.

-유독 영화에서는 독특한 역할을 맡는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날라리 만화가도 그렇고, '퍼햅스 러브'의 천사도 그렇고.

▲관객이 9대 1로 갈린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1을 위한 선물이었다.(웃음) 제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다. 일상적이지 않은 작품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캐릭터. 그런 것이 제게는 더 매력적이다. 멜로는 질질 짜야돼, 코미디는 이렇게 웃겨야 하고 욕은 이렇게 해야 돼. 이런 공식이 싫다. 나는 일반적이고 늘 반복되는 것에 싫증을 내는 부류다.

'오래된 정원'도 마찬가지고 다음 영화 '수' 역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영화를 보게 될 거다. 액션인데, 인대가 늘어나고 멍이 들고 찍히고 하는 모든 게 즐거웠다. 현장에서 희열이 막 느껴지고. 다친건 상관없다. 긴장을 안한 탓이니까.

-그래도 드라마에서는 이상적인 남자 역할을 많이 했는데.

▲드라마는 더 많은 대중이 보니까 계몽적이고 희망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 같다. 악역 맡은 배우는 진짜 나쁜놈으로 아는 순진한 시청자들이 계시지 않나. 제가 맡은 캐릭터들은 정말 다 멋졌다. '줄리엣의 남자'의 승우나 '러브레터'의 우진이는 정말 사랑해서 보내주는 남자였다. '대장금'의 민정호는 정말 세상에서 보기 힘든 완벽남이고.

-그래서 지진희씨를 이상화된 남성의 전형으로 보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 점이 내게도 영향을 미친다. '대장금'을 하면서 나도 민정호처럼 살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민정호가 장금이를 만나 하는 첫 대사에 '사람이 책을 가리지 책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잊을 수가 없는 말이다. 신념과 자신감을 갖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사랑에도 용기가 있는 남자.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배우로서의 의식같은 건 아직 잘 모르겠다. 배우라는 말과 연기자란 말의 차이도 아직 잘 모르겠는걸. 남보다 잘 하고 싶어서 나름 노력을 하지만, 이걸 하며 즐겁고 행복하고 싶을 뿐 고통받고 싶지 않다. 저와 가족이 고통에 시달리면서까지 이 일을 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면 아마 때려칠 지도 모른다.

-지난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아이랑 아내랑 유모차 끌고 시내에 가서 장난감 사면서 내 것도 샀다. 레이싱 DVD가 있길래 사주고 나는 옆에 있던 4만원짜리 헬리콥터 장난감이다. '애가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잽싸게 사서는 애가 구경하는데 나 혼자 놀고 그랬다. 원래 장난감을 좋아한다. 아이를 핑계로 다 사는거지. 제 장난감이 더 많다.(웃음)

-지진희씨 취향대로 영화를 하다보면 슬슬 이상화된 남자 뒤에 있는 지진희씨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겠다.(웃음)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인정하셔야지. 이해란 나를 누르는 것이고 인정은 나와 타인을 동시에 제자리에 두고 보는 것이다. 이해하려고 하면 당장은 될지 몰라도 나중에는 폭발한다. (웃음)

-지진희씨의 목표가 있다면?

▲나중에 정말 훌륭한 공예가가 되고 싶다.(웃음) 배우로서의 욕심이라면, 사실 죽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은 욕심이 솔직히 있고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사람이 되고싶지는 않다. 나중에 '엄마 지진희 알아요?'라고 물어보면 '괜찮은 사람이었지'라고 대답해주는 느낌이면 좋겠다. 튀고 싶은 맘도 없고. 이거 결코 겸손하지 않은 바람이다. 배우로 대성하겠다는 거보다 더 이루기 힘든 꿈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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