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순재' 이순재, '괴물준하' 정준하, '사육해미' 서민정…. 13일 종영을 앞둔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연출 김병욱)의 팬이라면 이런 4자 별명이 결코 낯설지 않을 터다. 이는 지엄한 가장을 야한 동영상이나 숨어서 보는 주책맞은 할아버지로, 두 아들을 둔 40대 가장을 술먹으면 돌변하는 '괴물'로, 그 아내는 마음대로 괴물을 부리는 '사육사'로 돌변시킨 증거들이다. 이들은 기발하고 신선하게 새로운 가족관계를 몸소 표현한다. 유독 변화하는 가족간의 권력 관계에 민감했던 '김병욱표 시트콤'의 특징이 '하이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셈이다.
가장의 권위도 경제력 따라
'순풍 산부인과', '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 김병욱 PD의 전작들처럼 '하이킥'에도 권위적인 가장을 중심으로 3대가 모여사는 대가족이 등장한다. 흔하지 않은 형태지만 가족간 힘의 관계를 포착하기에는 이만한 구성이 없다. 전 드라마와 비교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며느리 박해미의 위상이다. 박해미가 종전 시트콤의 며느리들과 다르게 강단있고 자신감 넘치는 아내이자 며느리, 어머니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캐릭터 탓만은 아니다.
달라진 권력관계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바로 경제적 능력. 박해미는 시아버지와 함께 한방병원을 이끄는 능력있는 의사다. 덕분에 실제로 아내에게 아들에게 권위적이고 호통을 일삼는 아버지 이순재도 며느리에게만은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부부관계에서도 박해미는 무능한 남편 이준하(정준하 분)보다 우위를 점한다. 직업도 없는 준하는 아버지로부터도 대걸레로 엉덩이를 찔리고 밥먹는다 타박을 받으며 파상적인 구박을 감내해야만 한다.
시어머니 vs며느리 관계 역전
그 덕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역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 '하이킥'의 시어머니 나문희와 며느리 박해미의 관계는 "구박은 무슨, 며느리 눈치보느라 못살겠다"는 요즘 시어머니들의 푸념을 대변하는 듯 하다. 변변찮은 아들을 둔 덕에 나문희는 똑 부러진 며느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면서 속을 태운다. 우연히 며느리가 혼나는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어 두고두고 고소해 하는 것이 나문희의 낙. 그런 시어머니의 모습은 코믹하기도 하지만 달라진 시어머니상의 씁쓸함을 맛보게도 한다.
형수님과 도련님의 新긴장관계
박해미의 돋보이는 위상이 경제적 능력 탓임은 도련님 이민용(최민용 분)과의 관계에서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인정받는 고등학교 교사인 민용은 능력없고 물러터진 형과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박해미와 사사건건 충돌한다. 카리스마 해미와 까칠민용이 만날 때는 형의 아내라고, 남편의 동생이라고 물러서고 봐주는 법이 없다. 영원한 앙숙이라는 며느리와 시누이의 긴장관계를 비틀어 형수와 도련님의 대립으로 풀어낸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친구처럼 지내는 이혼 부부
민용이 아이까지 두고서 이혼한 전 부인 신지와 보이는 관계 역시 흥미롭다. 이혼한 뒤 친구처럼 지내는 부부가 극의 중심에 온 것은 SBS '연애시대'가 먼저다. '연애시대'가 사랑하면서도 이혼했고, 그 뒤에도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멜로드라마의 형식으로 그려냈다면 '하이킥'은 코믹하고 함축적인 시트콤의 특기를 살렸다. 간간이 아직 남은 애틋한 마음이 표현됐고, 말미에 이르러 더 강화되기는 했지만 이혼에 따라 급증한 따로 아이를 돌보는 쿨한 싱글 가족은 '하이킥' 덕에 더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됐다.
종영을 앞두고 이순재가 현업에서 은퇴했다. 가족 내 박해미의 위상은 아마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런 그녀가 결코 밉게 보이지 않는 것은 합리적이고 당당한 그녀의 캐릭터 탓이 크다. 능력있는 여자를 성격나쁜 독한 여자로 묘사하곤 하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도 구분되는 설정이다. 능력있는 며느리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는 등 현대 가족 관계의 변화상을 그 어떤 드라마보다 절묘하고 간명하게 짚어낸 셈이다. 시대와의 긴밀한 호흡, 그것은 8개월을 지내 온 '하이킥'의 가장 큰 인기요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