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에도 유행이 있다. 지금 방송 3사를 휩쓸고 있는 가장 뜨거운 열풍을 꼽자면 드라마에선 '사극', 오락프로그램에서는 '무한도전'이 될 터. 방송 3사는 드라마 프라임 시간대에 사극만을 1주일 내내 방송하다시피 하고, '무한도전' 본방송과 재방송이 공중파와 케이블방송을 점령하는 무지막지한 열풍이다.
유행도 이쯤 되면 휩쓸리지 않기가 더욱 힘들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대세를 쫓지 않고 홀로 독야청청해 봐야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점. 방송이 나간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깔끔하게 정리돼 나오는 TV 시청률은 하나같이 '발빠르게 흐름을 따라 유행에 몸을 던지라'고 충고한다. 그러니 TV여, "대세를 따르라."
공중파 3사가 엇비슷한 시기에 사극을 선보이면서 시작된 '사극 열풍'은 이제 그 중반에 이른 느낌이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SBS '왕과 나'와 MBC '이산'이 버티고 있고,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MBC '태왕사신기'와 KBS 2TV '사육신'이 방송된다. 금요일 하루를 빼고 나면 주말에는 연장방송 이후 시청률에 더 탄력을 받은 KBS 1TV '대조영'이 시청자를 맞는다.
사극의 수가 많고 방송 시간이 길다는 단순한 편성표만으로 사극 열풍의 강도를 설명하긴 부족하다. 북한 제작 드라마의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전중인 '사육신'을 제외하면 이들 사극의 시청률은 낮아도 20% 안팎, 높으면 35%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전통의 시청률 강자 일일드라마와 주말극이 남부럽지 않은 결과다.
줄곧 사극 대신 개성 강한 현대극을 편성해 온 KBS 월화드라마의 시청률 성적을 비교해보면 '대세'의 영향력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종영한 '아이엠 샘'과 '얼렁뚱땅 흥신소'는 두 경쟁사의 시청률 홍수 속에 내내 1자릿수 시청률만을 지키고 있다. 대세를 탄 사극 '왕과 나', '이산'은 정면 대결 속에서도 20%대 시청률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오락프로그램에서는 장르가 아니라 이제는 대세가 되다시피 한 프로그램 하나를 너도나도 따라하는 게 대세가 됐다. 드라마의 왕국에서 예능프로그램으로는 유일하게 20%대 시청률에 안착한 '무한도전'은 자타가 인정하는 오락프로그램의 지존. 각 방송사들은 개성 강한 캐릭터, 출연진의 임기응변, 가공하지 않은 상황 설정, 초대손님 없는 진행으로 대변되는 '무한도전'식 예능프로그램을 속속 선보이며 대세에 동참했다.
케이블채널 MBC에브리원의 '무한걸스'는 이름부터 판박이. 남자 6명 대신 여자 6명을 내세워 각종 미션을 수행하도록 하는 방식 등이 '무한도전'과 똑같이 닮았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KBS 2TV '해피선데이'의 '1박2일' 코너도 '무한도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무한도전' 멤버인 노홍철이 출연하는 '1박2일'은 자연으로 떠난 출연자들의 가감없는 생활과 이야기를 담는 '리얼버라이어티'다.
출연자를 반으로 나눠 경쟁시키는 SBS '라인업' 역시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출연자 사이의 격식없는 대화를 가감없이 담아낸다. 유재석과 박명수가 함께하고 있는 KBS '해피투게더'는 두 사람의 치고받는 대화만으로도 '무한도전'의 향취를 강하게 풍긴다.
여기에서도 대세를 따른 효과는 여실히 입증된다. 최근 시청률 15%를 돌파한 '해피선데이'-'1박2일'은 일요일 오락프로그램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고, '해피투게더' 변화를 거듭하며 목요일 밤 11시대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무한걸스'는 케이블 프로그램이라는 태생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탄생 때부터 화제를 모으며 시청률에서도 호조를 보인다. '무한도전'과 대결하는 '라인업'만이 '대세'의 효과를 누리지 못할 뿐이다.
방송 관계자들은 '시청행태'라는 말로 이같은 방송계의 유행을 설명했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이것이 대세라는 느낌도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이 TV를 보는 방식 자체가 천천히 바뀌고 있다. 사극 열풍은 그 일례"라고 설명했다.
KBS의 한 드라마 PD는 "10대나 20대 대신 40대와 50대가 시청 주도권을 쥐면서 사극 장르가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장르가 된 것 같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의 강세 역시 같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예능 관계자는 "수없이 재방송되는 '무한도전'의 포맷을 학습하고 그에 적응한 시청자들이 거리낌없이 비슷한 포맷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며 "예전이면 분명 품위가 없다며 논란을 불렀을 강도높은 막말도 캐릭터에 묻어가며 그냥 웃고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