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53만여명의 관객을 불러모아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철저한 기획과 그에 맞는 시나리오 개발 등 기획영화의 새로운 기운을 충무로에 불어넣었다. 이후 한국영화계 제작 시스템의 변화가 있었다면 '결혼이야기'는 그 첫머리에 기록될 만하다.
'결혼이야기'가 던져준 새로움은 심혜진이 연기한 여성 캐릭터의 강렬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결혼이야기'가 새롭게 보였던 것도 극중 심혜진의 캐릭터였을 터이다.
라디오 단역 성우로 일하는 심혜진은 PD인 최민수와 주위의 반대를 딛고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행복한 일상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결혼 생활은 갈등 속으로 빠져든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두 사람. 결국 이혼에 이르고 이들의 사랑은 다시 결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은 이 같은 과정을 그린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 캐릭터에 주목했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말 그대로 '청순가련형'이었거나 '에로틱한 몸'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심혜진은 달랐다. 남성우월주의자인 최민수에게 당당한 자기주장을 펴고 애정표현에도 과감한, 당시 '신세대'들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현실적인 캐릭터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이후 할리우드의 전유물로만 생각되던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가 한국영화에 온전하게 자리잡았고 여성 캐릭터는 그 '계보'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결혼이야기'의 당당한 '신세대' 여성 캐릭터는 어느새 상대 남성을 '제압'하고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굳이 페미니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반쪽'인 여성의 위상은 이미 높아진 시점에서 더 이상 '신세대' 여성 캐릭터는 현실적이지 않았다. 또 여전히 한 켠에 남은 가련한 여주인공도 관객은 원치 않았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관객에게 '성(性)의 전복'처럼 다가왔고 그 신선한 충격은 관객 420만이라는 수치로 남았다.
지난 9월 개봉한 '두 얼굴의 여친' 속 정려원도 전지현의 '계보'에 든다.
순진한 남자친구를 골탕먹이면서도 뭔가 짠한 여운과 공감대를 남기고 불러내기까지 강렬한 캐릭터는 그렇게 진화해갔다.
그리고 오는 13일 개봉하는 영화 '싸움'. 김태희가 이 같은 여성 캐릭터 '계보'에 도전한다.
'싸움' 속 김태희의 모습은 실상 현실 속 숱한 여성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극중 이혼을 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사소해보이는 물건 하나를 둘러싸고 극중 전 남편 설경구와 격렬한 싸움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김태희는 '목숨을 내걸고' 무기를 든다.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육중한 지프로 설경구의 소형차를 부숴뜨릴 듯 몰아붙이는 모습에선 더 없는 냉혹함마저 드러난다. 자신을 위기에 빠트린 설경구의 거짓말에 분노한 탓이다.
이처럼 한국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당대 젊은이들의 사랑에 관한 한 일단을 그려내며 현실감 속에서 진화해왔다.
게다가 이들 여배우들에게 이 로맨틱 코미디와 극중 캐릭터는 비로소 이름값을 얻게 하는 데 큰 계기로 다가가기도 했다.
심혜진은 1980년대 말 데뷔해 '결혼이야기'를 통해 90년대 새로운 신세대 여배우로서 각광받았다. 전지현 역시 '엽기적인 그녀'로 '테크노걸'의 CF모델 이미지에서 벗어나 스크린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룹 샤크라 출신 정려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두 얼굴의 여친'은 그에게 '배우'로서 이름을 얻게 해줬다.
'싸움'의 김태희는 '중천'의 흥행 실패와 연기력 논란이 가져다준 상처를 말끔히 씻어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