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의 연속'. 사실 이 말처럼 진부한 표현도 없다. 연속되는 파란이 진정한 파란일까. 하지만 또한 이 말처럼 사람 헷갈리고 숨가쁘게 하는 일도 없다. 올해 영화계가 특히 그랬다. 평단과 언론이 다들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을 때, 당사자는 보란듯이 끝내 일을 '저질러 버린' 영화와 현상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평단과 언론이 다들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때, 관객은 싸늘하게 고개를 돌려버린 영화 또한 한두 편이 아니었다.
'천년학', 그래도 국민감독의 100번째 작품인데
세상 참 쉽게 갖다 붙이는 말이 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문근영에게는 '국민여동생', 안성기에게는 '국민배우', 그리고 임권택 감독에게는 '국민감독'. 뭔가 존경과 포괄과 대표성의 의미인데, 문제는 그에 걸맞은 대접과 결과가 도대체 없다는 것. 원래 '국민배우'라는 말이 북한의 '인민배우'에서 따온 수식어란 걸 떠올려 보면 더욱 씁쓸해진다.
올해 4월12일 개봉한 '천년학'. 대가의 100번째 작품답게 아름답게 휘날리는 과수원 꽃잎을 배경으로 두 남녀, 조재현과 오정해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과 인연을 징하게 그렸다. 평단은 "역시 경륜!"이라고, 언론은 "마스터피스!"라고 열렬히 응원했지만, 관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20만명도 안되는 관객만이 이 국민감독의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을 찾았을 뿐이었다.
'밀양', 아무리 이창동 감독이지만 또 외국에서 통할까?
전세계 평단의 반응으로만 보면 결코 임권택 감독에 크게 밀리지 않는 '오아시스'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 그가 참여정부 문화관광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본업으로 돌아와 만든 첫번째 작품 '밀양'은 역시나 '무거웠다'. '오아시스'에서 천착한 '소외당한' 장애인 문소리와 설경구의 그 순수하고 눈물나는 사랑, 그 사랑이 준 감동을 떠올려보시라.
'밀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송강호가 예의 '헤헤'거리며 밀양의 카센터 아저씨로 나오고, 전도연이 창졸간에 아들 유괴당한 어미로 나온 이 영화는 단독직입적으로 기독교적 용서와 현실적 감성간의 지극히 큰 간격을 '고발했다'. '다빈치코드'는 예수의 핏줄이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발칙한(?) 상상력에서라도 출발했지, 과연 이러한 '용서와 구원'이라는 무거운 주제의 '밀양'이 또한번 외국에서도 통할까. 하지만 결과는 국내 개봉(5월23일)과 거의 동시에 받아버린 '칸 여우주연상 수상'(5월27일)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설마 지난해만큼 하려고?
결과만 놓고 보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5월 공습설'만큼 돌고 도는 것도 없다. 아무리 극장 가기 좋은 계절이라지만, 한두 해도 아니고 어떻게 해마다 5월이면 그 이름도 유명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전세계 영화관을 점령하다시피 할까. 지난해만 해도 '미션 임파서블3' '다빈치 코드' '엑스맨 최후의 전쟁' '슈퍼맨 리턴즈'가 5~7월 한국에서 개봉, 엄청난 박스오피스 수입을 거뒀다.
올해 5~7월도 물론 라인업이 화려하긴 했다. '스파이더맨3' '슈렉3' '캐리비안의 해적-세상의 끝에서' '트랜스포머'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하지만 평단과 언론과 일부 영화제작자는 '혹시나' 했다. 우리쪽에는 송강호의 '우아한 세계', 장진의 '아들', 송혜교의 '황진이'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예상은 그저 '순진한' 기대와 바람이었다. 로봇들의 기절초풍 변신학 '트랜스포머'는 역대 외화 최고기록인 737만명을 동원했고, 한물 간 줄 알았던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4.0'마저 그 오래된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화려한 휴가', 지금 누가 80년 광주에 귀기울일까?
7월26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화려한 휴가' 제작사 관계자나 영화평론가들이 서로 물어본 건 "정말 될까?"였다. 27년전 광주, 그 아픈 이야기를 지금에야 떠올리는 게 무슨 흥행력이 있겠냐고. 그것도 무슨 새로운 해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발한 상상력을 가미한 SF적 변용도 아닌, 있는 그대로 '80년 5월 금남로'를 재현하겠다는데.
하지만 영화는 확실히 슬프고 처절했으며 또한 확실히 웃겼다. '고교생' 이준기의 의협심에, 그 동생 말리던 김상경의 변신에, 확성기 든 이요원의 몸부림, 아니 무엇보다 '괴물'처럼 묘사된 군인들의 폭력에 관객은 세월과 세대를 넘어 온 몸으로 공감했다. 그 와중에 터진 박철민과 박원상, 두 사나이의 징한 웃음은 이 무겁게 뭉친 영화의 근육을 살살 풀어주는 이완제였다. '화려한 휴가'는 결국 영화가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할 때, 언제 어디서든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줬다. 영화는 728만명이 봤다.
'디워', 확실히 이상해..기껏 100만~200만 정도 보겠지
심형래 감독의 '디워' 열풍은 일종의 전복이었다. 기존 충무로 영화작법에 대한, 그리고 기존 영화를 해부하고 잣대질하는 평단과 언론의 자세에 대한. 지난 8월1일 개봉을 앞두고 '디워'가 시사회를 가졌을 때 역시나 언론과 평단의 첫반응은 "스토리가 없다"였다. "CG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한달전에 개봉한) '트랜스포머' 정도는 아니었다"였다.
하지만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목표로 하겠다"는 2년 전 심 감독의 야심은 거의 실현됐다. 우선 국내 개봉 당일 41만명, 개봉 첫주에 295만명을 동원, 단번에 이상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언론은 "(아무리 그래도) 개봉 2주차에는 사그러들 것"이라고 심드렁했다. 그러다 400만, 500만을 넘어서면서 언론은 그제서야 모든 감각을 동원해 '디워' 기사를 쏟아냈다. 방송에선 100분 토론까지 벌어졌고, 인터넷에선 비판과 반비판이 그치질 않았다. 결국 '디워'는 842만명이 선택한 영화가 됐다.
제작비, 몸값..세상 모든 건 올라가는 거야
제작비와 출연료는 오로지 올라가는 것들로만 알았다. 또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대규모 개봉해, 개봉 1, 2주만에 치고빠지는 게 정답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따져보시라. 제작비 100억원이 든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관객 500만~600만. 상식적으로 이런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1년에 몇편이나 될까. 늘어가는 제작비와 곤두박질치는 수익률, 이 상황에서 영화 계속 만들 장사가 어디 있을까.
결국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제작사와 배우가 '정신을 차렸다'. 지난 7월 '대타협선언'을 통해 제작비 절감(및 재미있는 이야기 발굴)에 혼신을 다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한마디로 얼어붙은 투자자들을 향한 제작자들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이런 흐름에 일부 배우들도 동참했다. 최근 크랭크인 한 '그들이 온다'의 주연배우 이범수 등은 제작사가 투자 및 제작환경에 따라 제작비를 크게 줄이자 출연료를 "상상도 안되는 규모"로 대폭 줄였다.
허진호 이명세 송혜교 강동원, 올해는 꼭 일 낼꺼야
명불허전. 관객 동원력에서만 보면 올해 이 말이 꼭 맞지는 않았다. 우선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로 흥행대박을 터뜨린 김상진 감독. 올해는 강성진 유해진 나문희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으로 관객을 찾았지만 기대했던 '김상진표 코미디'의 센 한 방이 없었다. '왕의 남자'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 역시 지난해 '라디오 스타'처럼 평단과 언론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여기에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허진호 이명세 감독의 '행복'과 'M'도 빠질 수 없다.
기대에 못미친 건 비단 스타감독만이 아니다. '황진이'의 송혜교, 'M'의 강동원, '허브'의 강혜정, '쏜다'의 김수로 감우성 등 많은 스타들이 개봉전 화제몰이와 스크린을 꽉 채운 연기력에 비해 흥행에선 줄줄이 고배를 들이켰다. 설경구의 '그놈목소리', 하지원의 '1번가의 기적' 등만이 비교적 이름값을 한 정도. 이에 비해 김강우의 '식객', 주진모의 '사랑', 김윤진의 '세븐데이즈' 등은 소리소문 없이 선전했다. 이러다보니 올해 스타들의 티켓 파워에 대한 회의가 확산됐고, 일부 스타들은 발빠르게 TV로 방향을 트는 기민함을 보였다.
허영만 원작의 힘, 두번이나 통하겠어?
지난해 조승우 김혜수 주연의 '타짜'가 무려 684만명을 동원했을 때, 평단과 언론은 일치된 목소리로 "'범죄의 재구성' 감독(최동훈)의 힘, 그리고 허영만 원작의 힘"이라고 했다. 그러나 올해 같은 허영만 원작의 작품인 '식객'이 우여곡절 끝에 11월1일 개봉키로 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아무래도 김강우 이하나 임원희, 세 주연배우의 중량감이 '타짜'의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에 못미친 탓이었다.
게다가 개봉전 시사회 반응은 좀더 싸늘했다. "연출력이 에피소드별로 고르지 못하다" "임원희의 캐릭터가 너무 코믹에 치우쳤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와 폄하를 뛰어넘은 건 '타짜'는 물론 '비트' '아스팔트의 사나이' '미스터Q'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미 입증된 허영만 작가의 힘이었다. 그 힘이란 (만화 팬들은 그냥 알겠지만) 공들인 취재에서 오는 리얼리티와, 기승전결이 완벽한 스토리와 캐릭터가 주는 감동 덕분이다. 영화는 지난 주말(9일) 현재 전국관객 300만명을 내다보고 있다.
김태희, 또 연기논란에 휩싸이겠지
지난해 일부 언론이 '중천'의 김태희의 연기력을 대놓고 예의없이 비판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천상의 여인으로 나온 김태희가 '중천' 내내 스토리와 크게 상관없이 예쁘게 웃기만 해 '뜻있는' 관객을 실망시킨 건 사실. 오는 13일 개봉하는 조동오 감독의 '싸움' 역시 시사회 전까지만 해도 그 기대치는 이같은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김태희가 과격한 싸움을 일삼는 '망가진' 캐릭터로 변신했다는 소문만이 눈길을 끌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4일 언론배급 시사회 결과 김태희는 '변했다'. "데뷔후 처음으로 살아숨쉬는 동시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부터 "충무로의 차세대를 이끌 배우"라는 극찬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이게 상대배우 설경구의 코미디 덕분인지, '연애시대' 한지승 감독의 조련술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러한 평가 자체가 언론과 평단만의 생각인지는 13일 개봉후에 정확히 나오겠지만.
'색, 계', 사람들이 안보는 게 영화제 영화 아닌가?
이안 감독의 2시간40분짜리 이 영화를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볼 줄은 진정 몰랐다. 더구나 18세 관람가 영화라는 치명적 약점까지. 게다가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촬영상 수상이라는, 왠지 범접하기 힘든 타이틀도 선뜻 영화선택을 주저케 할 것으로 언론과 평단은 내다봤다. 하긴 '타인의 삶' '보랏' '바벨' '아버지의 깃발' '블러드 다이아몬드' 등 시상식과 영화제는 열광했으나 정작 국내관객은 외면한 영화가 그 얼마나 많았나.
그러나 개봉을 전후해 양조위와 탕웨이의 기기묘묘한 정사신이 화제가 되고, 30대 여성관객이 빠져들고 있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영화는 가속력이 붙었다. 보는 각도, 처한 상황 따라 여러 얼굴로 변하는 탕웨이의 매력과, 그녀가 처한 양자택일의 절박한 시대상황 역시 이 영화를 단지 '야한' 영화로 추락하는 걸 막았다. 10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결과 지난 주말까지 동원한 관객은 186만명. 현재 상영관수와 관객 추세로 볼 때 200만명 돌파는 시간문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