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시네클릭]판타지와 현실의 간극, '뜨거운 것이 좋아'

강유정 ,   |  2008.01.22 08:46


'싱글즈'(2003년)의 여성들은 세파에 맞서 "내 갈 길을 가겠노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그녀들은 과연 멋지고 또 훌륭하였다.


그 멋진 여자들을 세상에 내놓았던 감독 권칠인이 새 영화를 개봉했다. 이번에도 세 여자들이고 마찬가지로 원작이 있다. 이미숙, 김민희, 안소희가 주연을 맡은 '뜨거운 것이 좋아'가 바로 그 작품이다.

'싱글즈'가 둘이 아닌 하나여도 멋진 여자들을 위한 선언서였다면 '뜨거운 것이 좋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기를 꿈꾸는 여자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그렇다면 5년 만에 관객들과 만나는 권칠인 감독의 감각은 과연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칠인 감독의 시선과 태도는 여전히 신선하다. 영화가 시작되는 도입부, 아주 짧은 순간 제시되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특히 그렇다.

영화는 단 몇 마디의 대사와 행동으로 지금부터 이야기를 이끌고 갈 인물들을 훌륭하게 소개한다. 이를테면, "디카페인을 마실 거면 커피는 왜 마시니 이년아"라고 소리지르는 댄디한 엄마(이미숙), "내가 하숙생이냐"며 항변하는 이모(김민희)에게 "하숙생은 하숙비라도 내지"라고 응수하는 조카(안소희)처럼 말이다.


강모림의 만화 '10, 20 그리고 30'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각각의 연령대에 따른 여자들의 고민을 그려내고 있다. 10대 고등학생에게는 이성이냐, 동성이냐라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가, 40대 여성에게는 폐경이 기다리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영화가 결국 27살의 아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섹스 앤 더 시티'처럼 글을 쓰는 주인공의 내레이션과 함께 진행된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네 명의 주인공을 다루지만 아무래도 내레이터인 캐리의 드라마이듯이 '뜨거운 것이 좋아' 역시 20대, 아미의 시선에 중점을 둔다. 그렇다면 과연 27살 아미의 고민은 무엇일까?

예상대로 그녀는 일과 사랑, 결혼과 연애 사이에서 목하 갈등 중이다. 데뷔하지 못한, 가능성은 있으되 현재로서는 무능한 시나리오 작가라는 설정도 이 갈등을 곪게 한다. 입던 옷처럼 편하지만 너덜너덜한 남자친구, 경품 추첨으로 얻은 명품처럼 우연히 끼어든 완벽한 예비남편 모델, 아미는 이 두 가능성 사이에서 방황한다.

여기에 한 가지 갈등 요인이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일, 자아냐 아니면 부유한 웰빙 라이프냐, 고민은 점점 심각해진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장점이라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거운 주제들을 가벼운 농담으로 녹여내는 감각에 있다. "우리 앞으로 만나지 마요 대신 뒤로 만나요"와 같은 착하고 순박한 농담들이 이 영화의 정서 전반을 이끈다.

세련된 도회적 이미지로 굳어졌다고 믿었던 김민희의 연기도 감탄할 만하다. 술먹고, 토하고, 주정하는 그녀는 완벽한 27살의 루저 아미이기에 보족함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 어딘가 너무 '선언적'이다. 영화는 선언을 하듯 결혼보다는 자아를 그리고 편안한 무임승차보다는 고달픈 독주를 선택하는 여자들을 보여준다. 설정이나 캐릭터, 결국 일을 선택하는 아미의 행보는 '싱글즈'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보아왔던 것이기도 하다. 내용과 소재, 주제는 진부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2008년 버전으로 페이스 리프트된 셈이다.

한동안 천편일률적 해피 엔딩은 관객이 증오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갈등을 겪던 두 남녀가 결국 화해하고 결혼하는 동화적 구성에 대한 염증 말이다.

그런데 간혹 이런 생각도 든다. 그것이 과연 위안일까, 격려일까 아니면 판타지일까? 만일 현실적으로 희박한 가능성들이라면 이 결론들은 판타지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영화 속 승원(김성수)처럼 돈 잘 벌고, 잘 생기고, 예의 바르고 게다가 나의 꿈까지 존중하는 남자라면, 그런 남자가 정말 현실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남자를 구태여 거부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선언과 현실의 간극, 거기에 '뜨거운 것이 좋아'의 딜레마가 있다.

강유정(영화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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