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균 기자
"영화가 나올 때마다 더 난해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단순해진다는 사람도 있던대요."(웃음)
10~15일 신작 '밤과 낮'을 출품했던 제58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홍상수(47) 감독이 19일 귀국 인터뷰를 가졌다. 빡빡한 인터뷰 일정에 시차 적응이 안돼 채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달변이었다. 하지만 질문에는 '친절'하지 않았다. 희끗희끗해진 머리, 안경 뒤 잔잔히 빛나는 눈, 콧수염과 턱수염 사이의 굳건한 입은 정적이면서도 철학자나 교수 같은 풍모가 엿보였다.
28일 국내 관객에게도 선보이는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우고 파리로 도피한 국전 수상 작가 성남(김영호 분)이 옛 여자친구, 새로운 여자친구(박은혜 분)를 만난 뒤 한국에 있는 아내(황수정 분)에게 돌아오는 여정을 그렸다. 145분 내내 성남을 좇는 스토리는 '단순'해졌지만, 해석의 여지는 더욱 많아졌다. 그는 '모순의 병존'이라고 정의했다.
-영화에 어떤 의도성이 있습니까?
▶저한테 이메일을 보낸 스태프 중 비극적이라고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더군요. 옆에 있는 사람은 재밌게 봤다는데. 영화를 만들고 나면 흔히들 그 영화 속 어떤 지점들을 잡아내 의미화하려 하는데, 저는 어떤 메시지나 교훈의 전달 수단으로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서로 모순된 부분들이 하나의 인물이나 이야기 속에서 공존하는 것을 작품으로 만들 뿐입니다. 관객에 따라 얼마만큼을 보고 의미화하는지 달라지는 것이죠. 관람할 때의 기분이나 그런 것도 영향을 끼치고요.
의도는 없지만, 전체적인 디테일을 관장하는 '태도'는 있죠.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통념, 습관들, 믿음들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체험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들이 많잖아요. 경험을 통념의 잣대로 쉽게 재단하지 말고 감정이 오면 느껴봐야죠. 실체에 대한 자각 없이는 남의 시선 속에서 항상 갑갑할 수밖에 없죠. 일어난 일에 대해 스스로 의미화를 통해 자기결정을 해야한다는 '태도'가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힘, 실질적으로 자기 삶이 나아질 수 있는 힘이 영화에 반영돼있길 바랍니다.
ⓒ임성균 기자
-감독이 바라는대로 영화을 보던가요?
▶의미화는 보는 이의 절대적인 몫이죠. 모순되는 것들을 직감으로 배열하는데, 제가 영화 속에 심어놓은 요소가 예상한대로 맞아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예상치 못했던 틀거리로 보는 이들도 있어요. 그런 경우 굉장히 반갑죠.
-자신의 영화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모든 힘을 다해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정리하라. 남의 통념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 눈으로 오래 느낌을 관찰하다보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거다.
-이번 영화의 구상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요?
▶앞은 성남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파리에 간 것이고, 끝은 아내의 거짓말로 구제받게 되는 것이라는 줄거리로 시작했습니다. 거짓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구원의 과정이 합당하고 정당하게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통념이죠. 그런 통념이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죠. 결말에 좋은 의도로 남편을 구제하는 것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이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불륜을 (구원받아야할) 악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죠.
-주로 연애담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세상에서 남녀관계만큼 복잡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이라는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미신적이고 정신적 분열 상태가 되죠. 남녀관계만큼 흥미로운 건 없어요.
-영화 관객에게 하고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제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희망하는 것은 명쾌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걸 필요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영화가 딱 떨어지는 주제가 있다는게 영화관람이 주는 선입견이죠. 의미화가 안되면 감흥이 없다는 것은 의미화에 대한 강박이 아닐까요. 의미가 포착이 안된다면 그냥 놔두십시오. 인생은 명료하지 않은 겁니다. 마음대로 취사선택하시고, 자기 식대로 보면 됩니다. 관객의 몫을 점점 더 많이 두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스스로의 계기가 있으신가요?
▶행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자기 기질에 맞는 이데올리기나, 지혜 이따위 말들을 열심히 따라 해봤고, 철학, 종교도 많이 따라 해봤어요. 그런데 자기만의 필요에는 소득이 없었죠. 맞춤복이 아니었던거죠.
-영화 속 인물이 모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그 사람의 삶에 대한 반칙이죠. 경험한 여러가지 것들을 섞습니다.
ⓒ임성균 기자
-타이틀 '밤과 낮'이 의미하는 바가 있나요?
▶미국에서 생활도 했고 해서, '해변의 여인' 끝나고 나서 외국에서 한번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뉴욕에 방문했을 때 밤시간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했는데, 그 때 한국은 낮이었기 때문에 슈퍼마켓에서 쇼핑하면서 전화를 받았어요. 굉장히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절대적인 시간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 에피소드에서 제목도 결정했어요.
-일상적인 경험에서 소재를 많이 얻으시나봐요.
▶항상 그렇습니다. 흔히 겪는 일상적인 상황인데, 무언가 꿈틀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죠.
-아내가 많은 영감을 주시나봐요?
▶같이 사니까 제 경험에서 중요한 사람이죠.
-혹시 같은 쪽 일을 하시나요?
▶그건 아니에요. 제가 수입이 많이 없으니 부업을 하죠.
그와의 1시간30여분의 인터뷰에서 결국 영화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성남이 프랑스 입국시 만난 프랑스인이 던진 경고, 성남이 귀국해 꾸는 꿈이며, 목욕탕 창에 지나가는 돼지, 인도에 떨어진 작은 새.... 그런 의미들을 파악하는 것은 모두 보는 이의 몫이란다.
"산을 그리는데 거기 노란색을 칠하면 좋을 것 같아 칠했는데, 왜 노란색을 거기 칠했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잖아요. 직감이죠."
'홍상수'하면 딱 떠오르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천재'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특권일테다. 혹시 세계적인 영화감독 반열에 오른 이 감독의 '유희'에 '희롱' 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 설사 '사기'라도 할 수 없다. 그건 천재 예술가로 분류된 이들의 고유 영역이니까.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감독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나열한 이미지들에 희롱당했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지는 않을까요?" 그가 빙긋이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