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진짜배기 되기엔 빈틈이 많은

[너 영화? 나 김유준이야!]

김유준   |  2008.03.26 08:42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설프다 싶은 예상이 되레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을 때다. '숙명'을 볼 때 그랬다. 세상살이란 게 종잡기 어려워서 선견지명이 발휘되면 대체로 기쁘지만, 영화를 볼 때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그럴 줄 몰랐는데 주인공이 유령이고, 생각도 못했는데 걔가 쟤 애비이길 바란다.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심리란 으레 그렇다. '숙명'은 그 점에서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야기가 뻔하다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영웅본색'에 '열혈남아'를 섞어 슬쩍 흔들어 놓은 분위기라고 빈정거릴 생각도 없다. 장르 영화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 하지만 원래 그런 속에서 관객을 만족시키는 게 진짜배기다.

'노팅 힐'의 이야기는 앙상하기 짝이 없다. 톱스타가 서점 주인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흔하디흔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거꾸로 된 버전이다. 하지만 그런 약점은 절묘한 상황과 재기발랄한 대사들에 묻혀버린다. 리처드 커티스의 각본은, 오철중의 대사를 흉내 내면 그야말로 "기량 만개"다.


'영웅본색'이나 '열혈남아'도 마찬가지다. 주인공들 처지가 궁색하지만 언젠가는 악당들에게 복수하고 떨어진 강호의 의리를 제자리로 되돌릴 것임을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익히 짐작한다. 하지만 이 깡패 영화의 고전들은 그 약점을 훌륭하게 극복해낸다. 교묘한 상황, 비장한 대사, 신들린 듯한 연출과 연기로 언제 줄거리가 뻔했냐 싶게 만든다.

그처럼 진짜배기가 되기에 '숙명'의 만듦새는 빈틈이 너무 많다. 첫 장면의 액션이나 긴박감은 꽤나 훌륭하다. 수십 명이 지켜 선 카지노 금고를 달랑 네 명이 오로지 육박전만으로 턴다는 설정이 가당찮기는 해도,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 움직임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다. 설핏, 앞으로 뭔가 눈이 즐거울 액션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생겨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뒤의 액션 장면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우민(송승헌)이 길 한복판에서 깡패 떼에게 습격당하는 장면, 철중(권상우)이 도박장을 덮치는 장면, 우민이 마약 대금을 가로채는 장면은 첫 장면과 거기서 거기다. 고함지르고, 파이프를 휘두르고, 뼈마디가 부서지는 수준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다.

'숙명'에서 사람살이 냄새가 절절한 대사를 기다린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김해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썼다는 점은 그런 기대를 부추긴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나중에 어떻게 되나 보려고"라 응수하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파이란'의 대사에는 가슴에 메아리치는 뭔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기대 또한 부질없다. 인생의 맥락을 잡아채기에 "백의민족 아니랄까봐서 하얀 가루를 좋아한다"는 식의 말장난은 너무나 공허하다.

연기는 대체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야수'의 처절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권상우의 '양아치' 연기는 괜찮다. 얼굴에서 풍기는 천혜의 페이소스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 느낌이지만, 송승헌의 연기도 그럭저럭 제 몫을 한다. 백미는 김인권이다. 깨진 맥주병으로 배를 긋는 미치광이 연기는 '숙명'이 내세울 첫 번째 덕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둑의 달인들은 '정석은 외우되 잊어버리라'고 갈파한다. 정석을 달달 외워야 비로소 고수의 수준에 이르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김해곤 감독의 '숙명'은 '장르 영화의 관습이 뭔가?'에 대한 모범답안 같은 영화다. 무난한 연기, 그럴 듯한 인물 성격, 알아들어먹을 만한 대사, 여차저차 이어지는 줄거리….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차라리 정석을 잊었으면 결과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김유준 에스콰이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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