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니컬슨이 프리먼을 만났을때

[너 영화? 나 김유준이야!]

김유준   |  2008.04.16 08:08


시한부 인생 신세인 두 노인이 주인공이라면 영화가 갈 길은 대체로 둘 중 하나다. “바닷물을 빼버리고 숲도 베어버려라 / 이제 어느 것도 다 소용 없으니”라는 W. H. 오든 식의 가슴 아픈 장송곡이거나, 기적이 일어나는 감동의 드라마거나.


'버킷 리스트'는 이도 저도 아니다. 두 남자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목록으로 만들고, 그 일을 실행하며 하나씩 지워나간다.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유쾌하게 남은 삶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뒤 가족이 중요함을 깨닫는다는 약간은 진부한 결말.

나는 로브 라이너 감독을 좋아한다. 나는 이 사람이 잔잔한 화면의 힘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잔잔한 유머, 잔잔한 고통, 잔잔한 슬픔, 잔잔한 흐름. 이따금 소스라치는 공포('미저리')와 배꼽 빠지는 유머('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격렬한 투쟁('어 퓨 굿맨')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로브 라이너의 정수는 역시 잔잔함에 있다. 대표작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스탠 바이 미'. 요즘 들어서는 힘이 빠진 느낌이지만, '버킷 리스트'는 잔잔하고 유쾌한 로브 라이너의 미덕이 그나마 쏠쏠한 작품이다.


나는 잭 니컬슨을 좋아한다. 최근 세상을 버린 젊은 연기파 배우 히스 레저의 표현처럼 “말보로 냄새가 풍기는 목소리, 웃어도 웃는 게 아닌 미소, 실제로 보면 더 오싹한 풍모”가 좋다. 당당한 겉모습은 ‘근엄’이란 단어의 뜻과 일치하지만, 그 속에 광기('샤이닝')나 순진함('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또는 무기력함('어바웃 슈미트')이나 허영기('화성 침공')를 숨기고 있을 때 니컬슨의 연기는 빛을 발한다.

니컬슨은 속에 숨은 것을 은근히 드러낼 줄 아는 명배우다. 대표작은 '배트맨'과 '크로싱가드', 그리고 걸작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은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시나리오가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도 꼽힌다.


모건 프리먼 또한 못지않은 배우다. 검버섯 깨나 잡수신 이 늙은 배우가 입 꼬리를 슬쩍 추켜올리며 미소라도 지을 때면, 세상 모든 일이 다 잘될 것 같다. 지나치게 다작(多作)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쇼생크 탈출'의 늙은 죄수 앨리스 역으로 프리먼 아닌 다른 배우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전지전능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명해 보이다가도 툭툭 무기력함을 토로하는 이중성의 배우. 대표작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다.

평소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가 힘을 합쳤으니 이 영화를 주관적으로 싫어하기는 매우 힘들다. 객관적으로도 그리 나쁜 영화가 아니라는 느낌이다. 죽음을 다루면서 진지한 성찰을 게을리 했으니 고답적인 평론가들에게는 마뜩찮겠지만 완성도만큼은 단단하다. 때로는, 진중한 철학 강의보다 어깨 툭 치며 “열심히 살아라”는 이웃 아저씨의 충고가 삶에 더 힘이 되기도 한다. '버킷 리스트'는 그런 영화다.

제목에서 ‘버킷(Bucket)’은 ‘양동이’를 뜻한다. 미국 사람들은 죽는다는 말을 ‘양동이를 찬다(Kick the Bucket)’고 돌려서 표현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왜 ‘양동이를 찬다’가 ‘죽는다’는 뜻이 될까? 혹시 양동이 위에 올라가 목을 맨 뒤 양동이를 차며 죽어간다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않을까? 아니면 음식 든 양동이를 차는 행위가 우리나라로 치면 ‘밥숟가락 놓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섬뜩하고 애달프다.


<김유준 에스콰이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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