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범수 ⓒ 홍봉진 honggga@
이범수는 늦게 발동이 걸린 배우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치고 단역을 전전했다. '짝패'에 인상 깊은 악역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외과의사 봉달희' '온에어' 등 드라마로 훈남이 되기까지, 이범수가 걸어온 길은 곧지 않았다.
이범수는 자기애가 강하다. 가시밭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기에 가시밭길을 거쳐올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범수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사랑한다.
강한 자존심과 자부심은 때로는 주변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범수가 이범수일 수 있는 까닭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신뢰 때문이었다. 배우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웃음을 판다는 비난을 받을 때도, 엉망으로 망가져 처절한 웃음을 지을 때도, 이범수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자신한다.
그는 "내가 재능이 있으니 시킨 것이고, 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드라마로 인기를 얻자마자 쉴 틈 없이 공포영화에 직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범수는 비록 3개월 만에 영화가 찍고 개봉되더라도, 함께 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신인이라도, 나라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사'를 선택했다.
8월7일 개봉하는 '고사:피의 중간고사'로 공포영화에 처음 도전하는 이범수를 만났다.
-'고사'가 워낙 빠르게 제작이 이뤄져 불안하기도 했을 것 같다.
▶물리적으로 힘들거라 당연히 생각했다. '온에어' 후반부 때 제의를 받고 상식적으로 지금 촬영에 들어가 올 여름에 개봉할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왜 '고사'를 했나. 소속사에서 영화를 만든 것도 영향을 줬을 것 같은데.
▶일단 창 감독이랑 뮤직비디오를 3편 찍었는데 그 때마다 4~5일 동안 30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찍어내더라. 그래서 믿음이 갔다. 창 감독은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감독이었다면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소속한 매니지먼트사에서 만들었다는 것도 팔이 안으로 굽게 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억지춘향으로 했든, 어드벤티지를 가졌든, 이 영화의 세팅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신인들이 많다보니 촬영장에서 갈등도 빚어졌다던데.
▶글쎄 워낙 열악한 환경이니 자신이 맡은 임무에 집중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간섭과 충고, 조언이나 제약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남규리는 가수, 윤정희는 첫 영화, 김범은 신인이다. 혼자서 영화를 이끌었어야 했기에 큰 부담이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 처음하는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안했다. 이것은 결코 무시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간 것이다. 촬영이 빨리 진행되야 했기에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파악해야 했다.
-상대 배우의 연기를 평하자면.
▶남규리는 잘모르겠다. 왜냐면 가수니깐. 가수가 아니면 촬영장에서도 하나부터 가르쳤을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또 연기를 할지 안할지 모르니깐. 윤정희와 김범은 자신의 역할 속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세 사람 외에도 학생 연기자 대부분이 신인이었는데.
▶나 역시 데뷔를 학생 역으로 했다. 신인 연기자가 투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 반응을 잘하려 최선을 다했다. 상대를 동료 연기자로 인정하고 신뢰할 경우 연기에 대한 조언을 해서는 안된다. 반면 상대와의 정의를 선후배로 한다면 한 장면을 놓고 조언하고 이끌어줄 수 있다.
이번에는 후자로 포지션을 놓아야 했다.
-순박한 역과 악랄한 역이 모두 잘 어울린다. '고사'에서는 두 가지 인물을 동시에 표현하는데.
▶착한 역과 악한 역 중 어느 역이 좋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둘 다 매력있고 둘 다 자신있다. 동전의 앞뒤 같은 쾌감을 준다. '고사'를 택한 이유 중 하나가 내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화를 많이 했지만 정작 대중적인 인기는 드라마를 통해 얻었는데.
▶방송으로 인기를 얻었다고 해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연기를 잘해서 인정 받았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배우에서 스타로 넘어갔다는 평, 정말 짜릿했다. 중요한 것은 몰라서 못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운도 따랐고, 상황에 감사하고, 주변에 감사하고 있다.
-배우로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얼굴을 알린 특이한 케이스인데.
▶연락이 와서 시작했는데 열심히 하다보니 고정 출연을 하게 됐다. 다른 방송사에서 MBC하고만 할거냐는 소리도 들었다. 매니저 없이 활동하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재능이 있으니 됐다고 생각한다. 예능과 맞으니깐 고정을 할 수 있었지 않았겠나.
배우 이범수 ⓒ 홍봉진 honggga@
-차기작으로 로맨틱 코미디, 시대극, 마초물 등 다양한 배역을 제의 받은 것으로 아는데.
▶감사할 뿐이다.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었고 의도했었다. 한가지 이미지로 활동하다 소진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미국 진출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들었다. 더 넓은 무대, 더 넓은 스펙트럼에 대한 욕심인가.
▶더 넓은 무대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과 현실 가능한 생각과는 다르다. 미국 진출은 일단 막연한 생각이다. 반면 드라마로 아시아에서 반응이 있는 것을 보면 아시아는 현실 가능성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 혼자 생각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배우로서 사생활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회고해 보자면 난 학창시절부터 내 사생활을 포기하더라도 스타고 되고 싶었다.(웃음) 내가 사랑하는 직업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연기를 하면서 근질근질하도록 자극을 받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사람은 없고, '너는 내 운명'을 뺏긴 게 가장 나를 자극시켰다. 그 시련은 나를 단련시키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외부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해줬다.
아버지께서 어릴 적에 말씀하셨다. 돈을 벌려고 일을 하면 힘들 것이요, 즐기면서 하면 자연히 돈도 따라올 것이라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