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KBS사장이 국민에게 드리는 글(전문)

김수진 기자  |  2008.08.06 15:39
↑정연주 KBS 사장 ⓒ사진=이명근 기자 ↑정연주 KBS 사장 ⓒ사진=이명근 기자


정연주 KBS사장이 감사원의 사장 해임 요구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정연주 사장은 6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제1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앞서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글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다음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전문.


공영방송 KBS를 향해 거센 회오리가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정권은 공영방송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사장의 임기 보장을 폐기하고, 자신들의 정권적 안위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영방송 사장 ‘해임’이라는 초법적인 조치로 치닫고 있습니다. 공영방송의 독립은 무너지고, 언론의 자유, 그것이 근간이 되는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훼손을 당하고, 역사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합니다. 지난 세월,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난과 희생을 치르면서 이룩했던 민주주의 가치, 그것을 실현하는 민주적 제도와 절차는 심대하게 손상되고 있는 것을 지금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정권은 ‘정권의 국정 철학과 국정 기조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을 KBS 사장으로 앉히겠다는 공언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정권의 전리품으로, 그리고 ‘공영방송’ KBS를 ‘관영방송’으로, ‘정권의 홍보기관’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정권의 안위와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송독립을 위해 그동안 온갖 희생을 치러온 KBS 구성원들과 이 땅의 방송인들에 대한 모독일뿐더러, 민주시민의 성숙한 시민의식, 민주의식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KBS 사장의 거취 문제는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영방송의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그 동안 저를 사퇴시키기 위해 어떤 압박이 있어 왔는지, 어떤 비난과 음해가 있어 왔는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자리,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훌훌 털면 얼마든지 평화롭게, 편안하게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온갖 근거 없는 음해와 비난을 당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지켜온 이유는 바로 공영방송의 독립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공영방송의 독립성, 언론의 자유, 이의 근간이 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공영방송 KBS에 대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이자, 이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8월 5일은 ‘감사원 치욕의 날’

지난 몇 달 동안, 공영방송 KBS에 대해 권력기관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온갖 압박이 있었습니다. 감사원의 특별감사, 검찰의 저에 대한 ‘배임’ 수사, 국세청의 외주 독립제작사에 대한 세무조사, 방송통신위원회의 전격적인 신태섭 KBS 이사 자격박탈 등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에 따르는 것처럼 권력기관들이 일사분란하게 KBS를 향해 압박을 가해왔습니다. 그 압박의 칼날은 저의 거취 문제로 모아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5일 감사원은 예비감사 개시 2개월 10일 만에 서둘러 감사보고서를 확정짓고, '부실경영’ 등을 이유로 공영방송 사장을 ‘해임’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04년 KBS특별감사가 5개월 25일 만에 감사처분이 나온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입니다.


이번 특별감사의 출발, 진행되는 과정, 최종 보고서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정치적인 표적 감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우며, 특히 보고서 내용 가운데는 거짓과 왜곡, 자의적인 자료 선택과 해석 등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보고서가 정말 감사 전문가들이 두 달 동안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서 만든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대표적 사례를 보겠습니다.

우선 감사원은 2005년 KBS와 국세청의 세무조정 결과를 지적하면서 소송 조기종결이 없었다면 환급액 555억원은 발생하지 않고 추납액 366억원만 발생해 당기순손실이 345억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짓입니다. 2005년 결산손익에는 법인세 추납액이 이미 그해 3월에 비용으로 계상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환급액을 빼고 나더라도 그 해 KBS 당기 순이익은 21억원 흑자입니다. 그런데도 감사원은 기초적인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추납액을 이중으로 공제함으로써 당기순손실이 345억원이라고 허위, 왜곡된 보고서로 경영부실을 기정사실화 하려고 한 것입니다.

‘1,172억원 누적사업 손실’이라는 지적도 허위와 자의적 해석에 근거한 사례입니다. 경영성과를 각종 투자 및 재무의사결정에 따른 성과를 포괄하는 당기순손익을 외면하고(2003년 이후 KBS의 누적 당기순이익은 189억원 흑자입니다), 굳이 사업손익으로만 평가하려 드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데다, 그 계산방식이 ‘정연주 사장 5년의 평가’에 맞지 않는 거짓입니다. 사업손익만으로 계산하더라도, 큰 규모의 흑자가 발생했던 취임 첫해인 2003년의 사업이익 434억원은 제외시키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만을 계산해 총 ‘1,172억원의 누적사업 손실’이라고 못박은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감사원에서 ‘인사전횡’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하는 ‘특별승격’ 문제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KBS의 과거 국부장제 인사제도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일정 직급에 올라서 상당기간동안 부장직위를 경험하지 않으면 국장에 발탁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 연공제 서열제였습니다. 다만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에 소속 본부장의 추천을 받고 특별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특별승격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제도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제도를 활용해 능력은 있으나 경직된 제도 속에서 능력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던 직원들을 특별승격시킨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제도 안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인재를 발탁하는 것도 인사전횡이고 해임사유입니까? 더군다나 이 문제는 2004년 특별감사 때 감사대상이었으나, 감사원에서 KBS의 설명을 수용해 감사처분 대상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2004년 8월 팀제를 도입하면서 연공제 서열제가 근원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사보고서는 허위 왜곡 사실 등을 토대로 ‘현저한 비위’라면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송두리째 뒤 흔들 ‘사장 해임’을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8월 5일은 ‘감사원 치욕의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감사원 특별감사가 진행되던 7월 18일, 저는 이런 메모를 전해 받았습니다. 감사원 특별조사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부안 세트장(불멸의 이순신 세트장 지칭)과 관련하여 당초 방대한 양의 자료 첨부된 제보에 의해 시작. 어쩌면 그리 자료가 혹하게 잘 만들어졌나 할 정도여서 특별조사본부에서는 처음에는 큰 건이라 생각. 제보 내용은 사극 세트장 짓는데, 처음 통영, 여수, 부안을 고려하다 부안이 낙점을 받았는데, 사장 부인 고향이 그 쪽이라 투기 의혹이 있다는 것. 투기 의혹 조사를 위해 땅 구입 내역 살펴봤더니 사장 부인은 없더라”.

감사원 특별감사는 부안 세트장을 비롯하여 저와 관련된 ‘비리’가 없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제 운전기사를 불러다 몇 번씩 조사를 했고, 제 법인카드를 이 잡듯 뒤졌으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사는 아파트 주변의 슈퍼마켓까지 조사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털어도 ‘개인 비리’와 관련해서 뭐가 나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별감사가 끝날 즈음, 감사원의 한 직원이 이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모 기관의 기관장이 사표 제출을 거부해 감사가 들어갔다. 그 기관장은 이틀 만에 손을 들었다. 그런데 정연주 사장은 아무리 털어도 안 나온다”.

저 개인에 대한 ‘비리’만 조사한 건 물론 아니었습니다. 간부, 직원들에 대해서도 집중적인감사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5,300여명 전 직원의 주민등록 번호까지 제출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비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KBS는 이제 그만큼 투명해졌다는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이번 감사원 특별감사 결과 만천하에 확인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번 감사는 KBS의 투명성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번 감사가 정치감사, 표적감사라고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어디에서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어떤 다급한 정치적 일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서두를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뉴라이트 단체에서 국민감사를 청구한지 1주일도 되지 않아 감사를 시작했고, 본 감사를 24일 동안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32개 항에 대해 질의서를 보낸 뒤 답변서 제출 시한을 다급하게 정해 놓고 독촉을 하는가 하면, 답변서를 제출하기도 전에 저를 조사하겠다고 감사원 출두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KBS의 입장은 한결 같았습니다. △32개 항의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 작성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사장의 감사원 출두는 1979년 이후 38번 계속되어 온 KBS에 대한 감사원 감사에서 한 번도 없는 전례 없는 일이라는 점 △검찰 수사와 국세청의 외주사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감사원까지 나서서 급박하게 서두르면 정치 감사의 의혹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답변서가 다 작성되어 그것을 사장이 검토한 이후에라야 답변이 가능하다는 점 △사장에 대한 질문 내용이 너무 광범위한데다 그 대부분이 실무차원에서 진행된 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문서상으로도 답변할 수 있는 문제라는 점 등을 들어 출석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해왔던 것입니다. 8월 4일에는 오전 11시에 팩스를 보내 오후 2시까지 사장이 감사원에 출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답변서가 감사원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인 8월 5일 감사원은 감사위원회를 소집하여 감사결과를 처리했습니다. 어떤 일정에 쫓기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는 5년 전에 있었던 특별감사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2003년 11월 국회에서 KBS에 대한 특별감사 청구가 있었습니다. 11월 26일부터 엿새 동안 예비감사가 있었고, 12월 8일부터 1차 18일간, 이듬해 1월 2차 10일간, 모두 28일 동안 본감사가 있었습니다. 이번 특별감사 기간과 비슷합니다. 1월 31일에 최초 질문서가 발부되었고, 3월 31일부터 다시 10일간 3차 본감사가 있었습니다. 4월 26일 최종 답변서가 제출되었으며, 감사원 처분은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뒤인 5월 21일에 나왔습니다. 감사 시작부터 처분까지 177일이 걸렸습니다.

이에 비해 이번에는 감사 시작 72일 만에, 최종 답변서가 도착한 바로 다음날 아침 감사위원회를 열어 감사처분을 내렸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8월 5일 감사위원회 개최에 바로 뒤이어 KBS 이사회는 임시이사회를 급박하게 소집했습니다. 어디에선가에서 오는 신호에 따라 척척 움직이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KBS 이사회, 역사의 죄인 되지 마십시요

KBS 이사회는 KBS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11명의 이사들이 모두 사외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KBS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 엄중한 의무가 있는 이사회에서 KBS 독립을 파손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만약 그런 결정을 내릴 경우 역사 앞에 죄인이 될 것입니다.

국세청의 외주독립제작사에 대한 세무사찰을 지켜보노라면 쓰라린 가슴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작비 상승 등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취약한 외주제작사들이 KBS에 프로그램을 공급해 왔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어쩌면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혹독한 세무사찰을 받아 왔습니다.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도 오늘의 한류 열풍이 있도록 하는데 주역을 담당해 온 이들 외주제작사가 이제는 회사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형편이고, 그래서 한류 열풍의 한 축이 붕괴되기 직전입니다.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권력의 무지와 맹목성을 보면서 할 말을 잊게 됩니다.

공영방송의 ‘경영’ 목적이 돈 많이 버는 것입니까

공영방송 KBS 사장을 강제로 ‘해임’시키기 위해 ‘부실 경영’ ‘적자 경영’ 등 경영책임론도 동원되었습니다. 공영방송의 ‘경영’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사기업처럼 사적 이윤을 극대화하여 수지상의 흑자를 많이 늘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공영방송이 고품격의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시청자에게 봉사하고, 언론기관으로서 신뢰도와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영방송 ‘경영’입니까.

우선 제가 재임한 5년 동안 1천여 억의 적자가 누적되었다는 등의 허위사실부터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가장 간단한 숫자는 한국방송공사 설립이후 이익 또는 손실의 누적적 종합치를 보여주는 KBS의 이익 잉여금입니다. 제가 사장으로 취임(2003년 4월 말)하기 전 해인 2002년 말 이익 잉여금은 3,955억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07년 말 현재 이익 잉여금은 4,144억 원으로 189억원이 증가했습니다. 이 이상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5년 동안 수신료 수입(28년째 월 2500원으로 동결)은 거의 고정되어있고, 지상파 광고시장은 해마다 1천억 가깝게 축소되어 왔는데도 제작비는 50% 이상 증가하는, 그야 말로 혹독한 경영조건 속에서 KBS는 임금 동결 또는 억제, 토털 리뷰를 통한 예산 절감, 인력 채용 억제 등을 통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팀제 도입을 통해 간부직 1천개 삭감 △7개 지역국 기능조정 △ 송중계소 자동화를 통한 인력 효율화 △ 정년 퇴직자 숫자보다 적은 숫자의 신규채용 등 단계적 인력감축 등 KBS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 그 이상의 ‘경영성과’가 있습니까

저는 공영방송 ‘경영’을 수지상의 적자, 흑자라는 일반 사기업의 기준에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 문광위의 국정감사 때도, 이사회 때도, 노사협의회 때도 저의 ‘무능경영’ ‘적자 경영’을 질타할 때 저는 이런 생각을 늘 밝혀왔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KBS는 영항력 1위, 신뢰도 1위입니다. 저는 특히 2003년 이후 신뢰도 1위라는 대업을 성취한 KBS 구성원들의 노력에 말할 수 없는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느껴 왔습니다. 언론기관으로서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 그 이상의 성취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지난 5년 동안 KBS 구성원들의 탁월함을 믿어 왔기에 그들의 창의력과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라고 최대한의 자율성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자유가 넘쳐흐른 나머지 저에 대한 온갖 비판과 비난, 인신공격이 있어 왔어도, 저는 허용했습니다. 유신 독재와 5공의 암흑 시절,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싶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절절한 것인지를 온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기에, 저에 대한 온갖 음해와 비난도 보장해 주었습니다. 저는 인간의 성숙과 자율적인 자정 기능을 믿기에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합리적인 답을 찾게 될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그것도 성숙과 진보의 한 과정이니까요.

그렇게 자율과 자유를 허용한 결과 보도와 프로그램 제작에서 특히 눈부신 성과가 있었습니다. 방송 신문 통신, 그리고 본사와 지방 등 언론기관 전체의 보도를 대상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 달의 기자상’ 수상 내용을 보면 자명해집니다. 1993년 3월부터 5년 동안, KBS는 모두 18건의 기자상을 받았고, 1998년 5월부터 5년 동안 16건의 기자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임한 2003년 4월부터 2008년 6월까지 KBS는 ‘이 달의 기자상’을 모두 49번이나 받았습니다. 특히 보도본부에 탐사보도팀이 생기고, 시사기획 ‘쌈’ 프로그램이 신설된 이후 나라 안팎에서 참으로 값진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KBS 프로그램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수상실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송위원회가 주는 ‘방송대상’은 2005년부터 내리 4년 동안 ‘KBS 스페셜-도자기’, ‘대하 드라마-불멸의 이순신’,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HD-마음’ ‘차마고도’가 모두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국제무대에서도 지난 5년 동안 모두 36건의 상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 뿐 아닙니다. 공영방송 KBS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2003년 7월 방송을 시작한 KBS WORLD는 미국, 중국, 일본, 인도, 중남미 등 전세계 61개국, 4천만 가구, 2억여명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 높아진 위상은 이번 베이징 올림픽 시설내 공식 해외채널로 선정된 데서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KBS WORLD는 미국 CNN, 영국 BBC, 일본 NHK 등과 어깨를 같이 하면서 10개국 20개 채널 속에 당당히 포함되었습니다.

이 모든 성과는 자율과 자유가 허용된 공간에서 KBS 구성원들이 마음껏 자신의 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한 결과이며, 그 모든 성과는 당연히 KBS 구성원 모두의 몫입니다. 그런데도 KBS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붕괴하였다느니, KBS가 망하게 되었다느니, 부실경영이라느니 하는 비난은 과학적인 근거도, 합리적인 통계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일방적인 비난일 뿐입니다. 저는 저 개인에 대한 비난이나 인신공격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KBS 조직이나 구성원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KBS 프로그램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 모든 성과는 엄연한 사실이자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적 절차와 제도는 존중돼야 합니다. 우리가 피 흘리며 쌓아온 역사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민주적 절차와 제도는 존중돼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지난 세월 온갖 희생과 고난 끝에 얻어낸 참으로 값진 성취입니다. 그 어렵게 얻어낸 사회적 진보와 자산을 이렇듯 쉽게 허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공영방송 KBS만의 문제가 아닌, 언론의 자유가 그 바탕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심대한 훼손이자 역사의 퇴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도 숱한 시행착오 끝에 마련된 현행 방송법의 바탕에 도도하게 흐르는 정신이자 구체적 규정인 것입니다.

KBS 사장 선임과 관련된 법의 역사를 보면, 정부와 정권의 홍보수단으로서의 ‘관영방송’의 시대를 극복하고, 합당한 언론기관으로서의 ‘공영방송’으로 진화 발전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972년에 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서는 “문화공보부 장관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되어있었고, 1983년에 제정된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에는 “주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한다”로 일시 후퇴했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는 제청의 주체가 장관에서 이사회로 바뀌어 “사장은 이사회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한다”로 변경되었습니다. 제청의 주체는 주무 장관에서 이사회로 발전했으나, 대통령에게 ‘면권’을 부여함으로써 KBS 사장의 임기보장과 정치적 독립에는 제약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약과 한계는 6월 항쟁 이후 우리사회가 이룩한 시민적 자유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얻어진 통합방송법(2000년 1월 제정)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장은 이사회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진화했던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이룩한 이런 민주적 성과와 역사의 발전을 근원적으로 부정한다면 법 정신과 규정을 넘어서는 어떠한 초법적인 초치도 취할 수 있겠지요. 공영방송 KBS의 역할이 기껏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정권 홍보기관’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면,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된 사장을 강제로 ‘해임’하고, 새 사장으로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 구현할 수 있는’ 특보 출신이나 정권의 파수꾼을 임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태는 공영방송인 KBS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며, 이 땅의 방송인들에 대한 모독이며, 세계 공영방송인들의 조롱꺼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언론자유, 그것을 위한 정치적 독립성은 그 누구에게 양도하거나, 타협하거나, 박탈당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바탕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건강한 소통의 통로이며, 민주주의의 꽃이랄 수 있는 다양성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을 담는 포용이야 말로 한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영방송이 정권의 입맛에만 맞는 일방적 홍보만을 한다면 그 사회에는 건강한 소통과 다양성과 포용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KBS 구성원들의 방송독립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믿습니다

그동안 저는 저에 대한 온갖 음해와 근거 없는 비난이 있어도, 말을 아껴 왔습니다. 이 21세기 대명천지에 아무렴 상식과 합리를 뛰어넘는 일들이 일어날까, 우리가 성취해 놓은 민주적 절차와 제도까지 무시하는 일이야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랬기에 저에 대한 갖가지 사퇴 압박이 있어도,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민주적 절차와 제도에 따라서 이 문제를 푸십시오. 현행 방송법으로는 KBS 사장에 대한 ‘해임권’이 대통령에게 없으니, 그런 근거를 마련하여, 절차상 하자가 없는 방식으로 해결을 하십시오” 라고. 그런데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국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 그런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이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을 터인데,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수배로 도망자 신세였던 1980년 5.17 이후 미국 형님네로 건너가셨다가 그뒤 이국땅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이 며칠 전 꿈에 보였습니다. 근심어린 얼굴로 저를 가만 내려다보시면서 늘 그러하셨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늘 기도하고 있단다”.

저도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유신 때 그랬듯이, 5.17 이후 그랬듯이, 이 땅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다시 그 암흑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이 일시적으로 하늘과 땅을 덮을 수는 있습니다. 유신 독재 때 그랬고, 5공 암흑시절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 줌 햇살이 비치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눈먼 권력이 일시적으로 공영방송 KBS를 장악할 수야 있겠지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KBS 구성원들의 자존심과, 방송독립을 향한 그 뜨거운 열정과 신념, 정의감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송 독립을 위한 선한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데 공영방송인으로서 당당하고 의연하게 중요한 몫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8월 6일

KBS 사장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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