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송희진 기자 songhj@
손질안한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거기까진 좋다. 요즘 쌩얼이 대세니까. 그런데 파란 70년대 복고풍 '츄리닝'에 흙먼지 날리는 흰 운동화는 좀 너무하다 싶다. 모양 빠지게 호루라기를 쩝쩝 불어대지 않나. 그 부끄러운 머리띠라도 빼주면 안될까나? 찌질남이 대세라지만 찌질녀, 그건 아니잖아?
이소연, 그녀가 '확' 변했다. 2003년 배용준, 전도연, 이미숙과 출연한 영화 '스캔들'에서 예쁘장한 순진한 처자 역을 맡아 동네 도령의 마음을 흔들었다면 '복면달호'에서는 달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여인으로 등장했다.
SBS '봄날', KBS2TV '봄의 왈츠', MBC '신입사원', MBC '결혼합시다' 등 그녀는 출연작마다 뭇 여성들이 시샘할 수밖에 없는 조건 좋은 세련된 여성으로 나왔다. 사랑을 대하는 방법도 선택 당하기보다는 선택하는 당당한 쪽으로.
여배우들이라면 부러워할 법한 공주 같은 이런 역할들을 다 버리고 그녀가 계약직 육상부 코치로 돈 때문에 남자와 계약결혼까지 감행하는 궁색한 연기에 도전한다.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기자는 딱 한 가지 질문만 했다. "왜 공주이길 포기한 건가요?"
공주이길 포기했다? 공주면 어느 나라 공주죠? 하하. 제가 선택한 금이 역이 진정한 공주일 수도 있는데.. 역할이 배우를 만든다는 게 참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제가 깔끔하고 도도한 역을 주로 맡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제가 옷도 잘 입고 머리도 항상 예쁘게 하고 화장도 곱게 하는 줄 알아요.
이소연ⓒ송희진 기자 songhj@
제가 덜렁댈 거라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요. 근데 저 굉장히 털털하거든요. 친구들이 제가 이 역을 처음 맡았다니까 처음엔 '여배우이길 포기한 거야?'라고 놀리더니 이젠 '정말 딱 이야'라고 응원해주던 걸요. 저희 이모도 금이 역은 정말 사랑스러운 역이라고 했어요. 사실 저도 몸에 더 잘 맞는 거 같고요.
새삼 코디, 헤어, 메이크업 언니들 복이 많은 것에 고마움을 느껴요. 저 평소에 정말 패션 꽝인데. 그래서 이번 역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패션이라곤 파란 단벌 '츄리닝'이니까. 요즘은 메이크업이랑 헤어 하는데 30분도 안 걸려요. 한 25분 정도. 보통 작품 출연하면 2시간 정도 잡아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금이 역 덕분에 음식도 맘껏 먹었어요.
여배우라면 다들 체중 관리 하느라 난리인데 저는 살찌우느라 편하게 먹고. 참. 이러다 다음 역 안 들어오는 건 아니겠죠? 하하. 근데 이번 역 소화하려면 체력이 뒷받침 돼야 하니까 먹는 게 맞아요.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는다니까요. 우리 아이들(극 중 이소연이 맡은 육상부 학생들) 데리고 운동장 달리기도 매번 해야 하고, 피 뽑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해서 피도 진짜 뽑았고요. 처음에는 두려웠는데 피 검사도 해준다니까 뽑았죠.
내일은 토끼 뜀 촬영이 있다는데.. 촬영장에서 가끔 '나 주말 드라마 찍는 거 맞아? 스포츠 드라마 아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래도 제가 운동 신경이 좀 있어서. (으쓱) 학창 시절에 육상부 소속으로 강서구 대회도 나가고 했었거든요. 근데 저번 촬영 때는 상대역인 경우(신성록)랑 싸우다가 냉동 창고에도 갇혔어요. 콧물이 나면 바로 얼 정도였으니 춥더라고요.
경우는 정말. (찡그리며) 제 스타일 아니 예요. 제 이상형은 말이죠. 예전에는 자상하고 착한 남자에게 끌렸는데 이제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 나를 끌어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해요. 제일 친한 친구 (윤)주련이가 (김)진표 오빠랑 결혼 한 후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부쩍 들더라고요. 남자를 만나도 진지하게 만나고 싶고. 결혼을 늦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요. 때 되면 결혼해서 아기자기하게 살고 싶기도 하고.
근데 결혼하기 전까지 절대 열애한다고는 말 안하려고요. 남자가 있더라도요. 예전에 스캔들 기사 때문에 제가 좀 힘들었거든요. 이 일은 제가 공인으로서 말 한마디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더라고요. 사실 제가 딸 셋에 맏이인데 원래 맏이가 오랫동안 혼자서 귀여움을 받고 자라 그런지 더 철이 없는 경우도 많거든요. 근데 활동을 하면 할수록 성숙해지는 걸 제 스스로가 느껴요. 책임감도 생기고.
이번 작품이 꼬박 10 작품 째인데 예전에는 촬영장 가면 막내여서 선배들 따라가기 바빴는데 어느새 제가 선배가 됐더라고요. 그렇다고 왕 선배도 아니지만. 제 위치가 좀 어중간한데 신인 때는 그냥 열심히 했는데 이제는 배역에 색을 입히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슬픈 장면을 찍을 때 배우가 어떤 표정으로 하느냐에 따라 시청자들에게 감동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어떤 장면에서는 목 놓아 통곡하는 것보다 입을 꽉 깨물고 눈물을 삼키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전 매일 모니터하고 공부해요. 저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청자들이 내 연기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나의 최선의 노력은 무엇일까. 그런 건데. 제가 완벽주의자 타입은 아닌데 이 직업을 하게 되면서 그렇게 변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배우라면 시청자들에게 여러 역할을 보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게 제 믿음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제가 공주이길 포기했다기보다는 다양한 공주 역을 소화하겠다는 걸로 봐주면 어떨까요. 사실 인생이란 시나리오를 볼 때 사람은 누구나 공주일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