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홍봉진 기자 honggga@
김영호는 말한다. 생김새가 썩 고운 배우는 아니라고. 맞다. 그래서 '야인시대'는 적역이었다.
하지만 큰 바위에서 졸졸 흐르는 약수처럼 그의 큰 덩치에서 배어나는 섬세한 감성은 김영호에 다양한 생명력을 줬다. 그는 올해만 '방울 토마토'와 '밤과 낮', 그리고 '미인도' 세 편의 개봉작에 출연했다.
달동네에서 자신의 딸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돈을 훔치는 남자와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들킬까봐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난 뒤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 다시 도망치는 남자. 그리고 조선 중기 최고의 화가라는 김홍도까지.
김영호는 너무 다른 세 남자를 연기했다. 그것은 김영호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새로운 인물을 연기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주술사에 비유했다. 자신을 비우고 다른 이의 영혼으로 채운다고 말했다. 김영호는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의 능력을 사랑하고, 제자의 삶에 질투를 느끼는 '미인도' 속 김홍도의 영혼을 이번에도 불러들였다고 했다.
김홍도였던 김영호를 만났다. 실제 김홍도도 김영호처럼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했다 한다.
-막상 영화를 보니 시나리오와 어떻게 다르던가.
▶비교를 잘못한다. 그저 매 장면을 보면서 그 장면 때 고생했던 스태프들이 생각난다. 아, 저 장면에서는 조명 막내가 힘들었지, 뭐 이런 생각들이 많이 나더라.
-시나리오부터 노출과 베드신이 눈에 띄었을 텐데. 시나리오에 없던 베드신도 생겼고.
▶김민선을 뒤에서 겁탈하는 장면은 1분 전까지 어떻게 찍을 지 아무도 몰랐다. 감독에게 그냥 나를 믿어달라고만 했다. 그냥 내가 김홍도가 됐으니 그런 감정으로 했을 것이라 생각해 행동한 것이다.
아무래도 몸이 만들어내는 언어신이 아닌가. 다만 김민선을 집어던질 때 다른 손으로는 다치지 않도록 얼굴을 받쳤다. 그래서 김민선이 배려에 감사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왜 '미인도'에 출연했나.
▶김홍도라는 사람이 좋았다. 이 작품에는 베테랑이 필요했고 꽤 많은 남자배우들에게 시나리오가 갔다. 하지만 쉽지 않은 역이기에 고사를 했다. 그런데 나는 김홍도라는 이름에서 왜 한 번 들어도 이상하게 끌리는 인연 같은 게 느껴졌다. 전생에서의 인연처럼.
-'바람의 화원'의 박신양과도 비교될 수 있는데. 외형부터 차이가 분명하고.
▶박신양은 좋은 배우고 비교된다면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난 비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바람의 화원'을 보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냥 김홍도가 사람들에게 포장된 예술혼으로만 기억된다면 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그리고 싶었다.
-김홍도와 어떻게 접신하게 됐나.
▶내 안에 촛불을 켜놓고 김홍도를 불러내려 애썼다. 내게 예술의 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김홍도가 꼭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영혼을 비우고 김홍도를 부르려했다. 물 떠놓고 기도도 하고 별 짓을 다했다.
-매 작품마다 그 캐릭터의 영혼을 불러들이나. 아니면 자신 안에서 닮은 것을 끄집어내려 하나.
▶매 전쟁 마다 때로는 장비가 되고, 때로는 손자가 되고, 때로는 관우가 된다.
-매 작품을 전쟁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손자병법에서 인생의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보니 연기도 전쟁처럼 임한다.
-드라마를 하면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에 투신했다. 돈을 벌기도 힘든 작품을 했고.
▶내 친구에게 나는 어떤 배우가 될 것 같냐고 어릴 적에 물었다. 그 친구가 너는 얼굴이 잘생겨서 빨리 팔리는 배우는 아닐 것이며, 집이 좋아서 성공하는 배우도 아닐 것이며, 성적 매력이 뛰어난 배우도 아닐 것이라고 하더라.
드라마 '바보 같은 사랑'으로 주목받았지만 '신장개업'이나 '유령' 등 영화로 시작했다. 하지만 고뇌할 수 있는 역은 적었다. '야인시대'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뇌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터닝 포인트는 '밤과 낮'이었다. 내 안의 엑기스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난 어떤 배우냐면 화려하지 않은 숀 펜 같은 배우였던 것이다.
김영호 ⓒ홍봉진 기자 honggga@
-당신은 어떤 연기자인가.
▶연기자는 주술사라고 생각한다. 유체를 이탈해서 자신의 영혼을 비우고 다른 영혼을 불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심하게 들어오면 나가기가 힘들다. 김홍도 선생님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연기하면서 김홍도가 내게 완전히 들어왔다고 느낀 순간은.
▶김민선을 추자현처럼 착각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저절로 눈물이 나더라. 예전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연인을 지금에서야 만난 것처럼. 그래서 그 장면이 끝나고 김민선에게 문자를 보냈다. 천년의 세월을 지나 바람으로 만나서 슬픈 눈으로 내리니 하늘도 서러워 눈물을 흘린다고.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에서도 그렇고 공식석상에서는 말을 잘 하지 않던데.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그런다.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좋은데 플래시가 떠지는 자리는 머리가 하얗게 된다. 태생이 야생이고 시골이라서 그런가.
또 그런 자리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인도' 기자회견에서도 어느 순간 마이크를 아예 밑에 내려놓았다.
-올해는 배우로서 의미있는 한 해였던 것 같은데.
▶내가 연기자로서 받을 수 있는 극찬을 '밤과 낮'부터 계속 받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흉년이었지만 배우로서는 최고의 해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상복은 없다. '밤과 낮'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법도 한데.
▶좋아한다는 팬들의 소리가 가장 큰 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정말 연기를 잘봤다고 다가오는 팬들이 많다. 매일매일 상을 받고 있다.
-이제 연기에 있어 삶에 있어 가치관을 확고히 세워 스스로 '불혹'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아직 천만번 날 울게 하고 싶다. 이제야 책임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라를 지키는 마음으로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싶다. 내 연기를 연고. 영혼을 비울 준비가 돼 있다. 누구라도 될 준비가 돼 있다.
조관우가 절친한 친구다. '코스모스' 뮤직비디오도 내가 연출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연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노래를 들으면 그냥 행복해진다. 내 연기를 보고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각오를 지금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