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로 칸영화제를 찾은 김해숙이 크로와제 거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김해숙은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열에 달뜬 모습이었다. 지난 15일 저녁(현지시간) 칸 뤼미에르 극장 앞에서 '박쥐'로 레드카펫을 밟은 그녀는 "영화를 찍고 있는 것만 같아서 실감이 안났어요"라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기생활 35년, 올해 나이 쉰다섯. 칸의 레드카펫은 젊은 배우들만의 몫이라 믿었기에 중년배우로 그곳에 섰다는데 더욱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16일 칸 크로와제 거리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만난 김해숙은 "꿈 같다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이번에 확실히 알게됐다"고 말했다.
김해숙은 이날 새벽까지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 김옥빈 등 '박쥐' 팀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며 웃었다. 김해숙은 레드카펫 행사를 갖기 전 한국 취재진과 가진 공동 인터뷰에서 "칸 레드카펫에 서면 눈물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금빛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박쥐' 팀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레드카펫에 섰다. 당당했으며, 자신감이 넘쳤으며, 행복해보였다. 김해숙이 입은 한복도 화제였다. 갈라 스크리닝에 참석한 해외 영화인들은 앞 다퉈 김해숙에 "드레스가 너무 아름답다" "한국 전통 의상이냐"고 물었다.
김해숙은 "한국의 어머니란 칭호를 듣고 있는 만큼 레드카펫도 그런 모습으로 서고 싶었다"고 했다. 세계 유명배우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는 행사에 우리나라 옷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한국의 어머니 또는 국민엄마로 불리는 배우들이 더러 있지만 사실 김해숙은 그중 막내다. '마더'로 칸을 찾은 김혜자가 김해숙의 어머니로 드라마에 출연한 적도 있다. 김해숙은 그렇기에, 막내기에, 더 큰 책임감과 의무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들의 세대가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불리지만 "내 안에도 여러 어머니가 담겨있듯이 그런 어머니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해숙은 '경축! 우리사랑'에선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어머니를, '무방비도시'에선 소매치기 어머니를, 그리고 '박쥐'에선 왜곡된 모정을 지닌 어머니를 연기했다.
김해숙은 "한국의 어머니라 불리는 배우 중 제일 막내인데 여기서 안주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미소 지었다.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미소였다.
박찬욱 감독을 평소 너무 좋아하고 존경했다는 그녀는 처음 '박쥐'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드라마 녹화 도중 연락을 받자 그 자리에서 만세삼창을 했다며 웃었다.
"그 나이에 주책이라고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정말 기쁜 걸 어떡해요. 딸이 절 보고 '엄마 머리에 지금 박쥐가 날고 있죠'라고도 했어요."
김해숙에게 '박쥐' 촬영은 근육을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돌려야 했고, 눈빛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야 했으며, 주스를 통째로 들이켜야 했지만 마냥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박쥐'에서 모습이 가수 하하의 어머니 '융드옥정'과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혹여나 '박쥐'가 칸영화제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있었지만 막상 결정이 됐을 때는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처럼 또 만세삼창을 불렀다. 김해숙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만끽했으며, 즐거워했고, 행복해했다. 그건 칸영화제가 갖고 있는 의미 뿐 아니라 젊은 배우들만의 전유물이라 포기했던 꿈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라 스크리닝이 끝나고 모든 관객들이 일어나 박수를 끊이지 않고 쳤을 때 김해숙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내비쳤다. 감동이었고, 행복의 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여우주연상 후보로 오고 싶다는 꿈도 숨기지 않았다. 그건 김해숙이 걸어가는 길이 그대로 여자 후배들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자 목표가 되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에요. 레드카펫이 영광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난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어요."
지중해 햇살 때문인지, 그녀의 당당함 때문인지, 김해숙에 빛이 넘쳤다. 중견연기자, 국민엄마가 아닌 배우 김해숙의 연기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