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중훈 ⓒ사진=이명근 기자
나이 마흔셋의 25년 차 영화배우. 박중훈은 한국 영화계의 독보적인 존재다. 긴 시간 한국 영화의 변화와 발전을 함께했고, 변신을 거듭하며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그에게 더욱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40편 가까운 작품을 해오면서도 한결같은 에너지와 유쾌함이 아닐까.
박중훈은 오는 22일 개봉을 앞둔 영화 '해운대'(감독 윤제균·제작 JK픽쳐스)에 출연했다. 100억 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한국 영화 최초의 재난영화로 화제를 모은 '해운대'에서 그가 맡은 인물은 지진전문가인 김휘 박사. 영화 속 김휘 박사는 시원한 웃음 한 번 짓는 일이 없지만, 직접 만난 그에게선 유쾌한 에너지가 넘쳐났다.
25년의 영화 경력에서 제일 엘리트를 맡았다며 활짝 웃던 박중훈은 조연도 처음, CG 작업도 처음, 물벼락 속에서의 촬영도 처음이었다며 신나했다. "설렘을 잃어버리는 순간 배우는 그만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박중훈의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해운대'는 공개 전부터 CG를 두고 초미의 관심이 쏠렸다. 실제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난 기대 안했다는 사람이 이해가 안 된다. 나야 영화 찍는 사람이니 잘 찍힌 것도, CG가 잘 나올 것도 알았지만. 우리 기술도 많이 발전했다. 가까운 장래에는 CG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그런 날이 오길 희망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CG 나온다고 그걸 걱정하진 않지 않나. 영화가 잘 나왔냐가 관심이 돼야지.
가만 생각해보면 1970년대엔 '총천연색 칼라 시네마그래프'가 홍보 문구로 들어갔다. '칠수와 만수'의 경우엔 '완전 동시 녹음'이 홍보 카피였다. 가까운 장래엔 '2009년 '해운대' 개봉 땐 CG가 관심이었어'라고 웃을 날이 오길 바란다.
배우 박중훈 ⓒ사진=이명근 기자
-CG에 쏠리는 관심이 서운했나보다.
▶그렇다기보다, CG나 특수효과는 콘텐츠를 돋보이게 하는 것 뿐인데 이게 어떻게 초점이 되는건지 좀 당혹스럽더라. CG가 맞춤법이고, 영화가 글이라면 이건 맞춤법 틀렸나 맞았나만 보는 형국이다. 맞춤법은 좋은 글을 신뢰 있게 전달하는 방법이지만 그게 어떻게 평가 기준이 되겠나.
그런데 이율배반적인 게 있다. 100억이긴 해도 할리우드보다 훨씬 적은 제작비라고 'CG가 가능하겠어' 하면서도, 비교는 할리우드와 하지 않나. 축구만 해도 박지성 선수가 자랑스러워 죽겠지만, 그렇다고 호날두랑 비교는 안한다. 톱 리그에서 대등하게 뛴다는 거 자체가 자랑스럽다. 축구에는 어드밴티지를 주면서 영화는 안 주지 않나. 한국영화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1.5%라고 한다. 한국 영화는 4강은 물론이고 16강에도 간 적이 없는데 눈높이는 저만치에 있다.
-데뷔 후 가장 엘리트 역할을 맡았다. 웃음기도 없다.
▶다큐멘터리 찍는 것 같더라고. '다다다다' 말만 했다. 그런데 인터뷰마다 느끼는 게 '이번 영화엔 코미디가 전혀 없어' 이 이야기를 10년째 듣는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투가이즈' 말고는 코미디 영화가 하나도 없는데 매번 '이번엔 코미디 안 하셨네요' 소리를 듣는다. 코미디 임팩트가 커서 그렇다. 더 히트는 '해운대' 윤제균 감독은 물론이고 모든 감독들이 '이번엔 박중훈에게 코미디를 안 시키고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러는 거다. 어휴. 이 이야길 이명세 감독, 이준익 감독도 똑같이 했다.(웃음)
배우 박중훈 ⓒ사진=이명근 기자
-그 이야기들을 같이 들은 기억이 난다.(웃음)
▶이미지라는 게 한 순간에 오는 게 아니라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는 거다. 다 세월이 있는 거지. 20대의 가벼움에서 내 자체가 변해온 점도 있다. 일련의 영화에서 두께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역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할 수 있는 것이랑 관객이 받아들이는 건 다르지 않나. 10년간의 이미지가 녹아들어간 셈이다.
-첫 조연을 맡아 화제가 됐다.
▶내가 '라디오스타'로 청룡상을 탈 때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진짜로 괜찮은 조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주연 섭외만 오는 거다. 합리적 개런티를 받고 근사한 조연을 한다면 내가 연기할 수 있는 폭이 얼마나 풍성해질까 기대도 했다. 나이를 떠나 난 24년간 노출된 배우다. 대중들은 신선함을 원하지만 난 그런 신선함이 부족하지 않나. 그러던 차에 거짓말처럼 '해운대' 제의가 왔다. 조연으로 내려간 게 아니라, 조연도 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히는 거다. 출연료와 역할의 크기를 유연하게 생각하니 할 게 많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게, 관념하고 체득하고 다르듯이 막상 닥치니까 사람이 서운하더라니까.(웃음) 이름이 세 번째에 나오고 포스터에 얼굴이 작게 나오는데 서운하더라.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인지상정이지. 처음 한 두 번 당황스러웠던 걸 빼면 내가 조금은 편해진 것 같다.
-고생도 많이 했나.
▶사실 난 고생은 많이 안했다. 나는 그래도 보송보송하게 찍었지.(웃음) 다른 배우들에게 미안하더라고. 나는 촬영을 15회 나갔는데 회식은 17번 참석했다. 내가 부산 내려가는 날이 회식하는 날이었다.(웃음)
-폐지된 '박중훈쇼'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런 경험이 많다. 다 될 줄 알았는데 안 된 경험. 그러다보니 굳은살이 배긴다. 실패의 큰 충격이 없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최근 출연한 '무릎팍도사'는 어땠나.
▶그 정도야. 내가 옛날에 '무릎팍 도사'에 대해 말한 게 와전된 건 있다. 한 쪽으로만 예능 프로가 흐른다는 게 문제지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방송이 있어야지, 다양하지가 않아서 문제라는 거다. 나의 길을 가는 건 '박중훈쇼' 같은 방식도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거다.
-40편 가까운 영화를 찍었다. 개봉 소감이 어떤가.
▶다른 건 없다. 설렘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배우를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긴장과 설렘이 계속 있어야 한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찍을 때 마다 데뷔작 같고 신선하다. 지금도 촬영 버스 보면 가슴이 설렌다. 아직도 남의 촬영버스 보면 구경하고 싶고 그런다.
-'무릎팍도사'에서도 그렇고 에너지가 대단하다.
▶기분이 좋은 건 이번에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CG 연기도 처음이고, 이렇게 집단으로 여러 배우가 나오는 영화도 처음이다. 그렇게 많은 물과 찍은 것도 처음이다. 사실 영화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에너지 덩어리다. 무쇠 체력들이지. 어떻게 그렇게 날밤을 새며 영화를 찍나. 내가 고등학교 별명 중 하나가 '박지랄' 이었다.(웃음)
-그러고 보니 박중훈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 비결이 있다면.
▶재밌는 게 나랑 같이 신인이었던 사람이 주현미씨다. 그래도 동안인 편이라 덕을 본다. 다른 비결이 있겠나. 운동하고 많이 웃고.
-갑자기 훈련 잘 된 아이돌스타랑 인터뷰하는 기분이다.
▶아 그거 아닌데. 많이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하는 것 뿐이다. 기본을 지키는 거다. 정말 그거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