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민·문소리, 아픈 그들의 판타지는 아름다웠다

김관명 기자  |  2009.09.17 08:31
위부터 \'내사랑 내곁에\'의 김명민, \'오아시스\'의 문소리. 위부터 '내사랑 내곁에'의 김명민, '오아시스'의 문소리.


감히 말하자면, 땀범벅이었다가 찬물 세수한 그런 느낌?

그랬다. 김명민과 문소리의 판타지는 맑고 아름다웠다. 최근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내 사랑 내곁에'(감독 박진표)의 김명민이 그랬고, 예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의 문소리가 그랬다.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로 몹시 아팠던 그들이 잠시 꾸고 달랬던 그 꿈과 판타지. 그들은 그속에서 더이상 강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김명민은 온 몸이 굳어가는 루게릭 환자로 나왔다. 사랑하는 아내 하지원이 없는 병실, 모기 한 마리가 뺨에 붙었다. 쫓으려도 그럴 수가 없는 그 몸의 처절한 한계. 순간 김명민은 모기를 보기 좋게 딱 하니 뭉개버리고 술술 병원 침대에서 털고 일어나 멋지게 혼자서 춤을 췄다. 이 아름답고 속상한 병실과 환자의 판타지. 이런 모습 보며 가슴 아릴 환자나 그 가족들, 앞으로 많을 게다.

문소리는 예뻤다. '오아시스'에서 심한 장애를 앓았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환한 미소와 얼굴로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쏘다녔다. 그것도 자신을 살뜰히 챙겨줬던 설경구와 그렇게 그리던 사랑까지. 고통 속에서 '오아시스'의 그녀를 봐야했던 관객은, 내 일처럼 갑갑해 해야 했던 선량한 관객은 이런 그녀의 변신에 잠시나마 황홀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강하게 그녀의 현실과 판타지를 대비시킨 영화의 힘에 질려버렸다.


그러나 이들 판타지는 속상했다. 이런 판타지가 쏟아낸 거의 일방적인 희열은 그들에게도, 관객에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김명민은 어느새 다시 꼼짝 못하는 환자로 되돌아와야 했고, 문소리는 다시 오아시스 그림이 붙어있는 좁은 방안에 얼굴과 온 몸을 찡그린 채 누워있어야 했다. 현실은 다시 그들을 옥죄어 왔다. 몸은 그들 것이 아니었다. 하지원은 여전히 자신의 곁에 없었으며, 설경구에겐 어떤 속마음도 내보일 수가 없었더랬다.

이런 아름답되 안타까운 판타지가 어디 한둘이랴. 느닷없는 에이즈에, 못된 옛 남자의 기습에 가까이 왔던 행복이 도망치려는 순간에 전도연이 그려낸 판타지가 그랬고('너는 내운명'), 창졸간에 납치당한 아들이 기적적으로 생환한 안젤리나 졸리의 슬픈 환상이 그랬다('체인질링'). 과거마저 아름답다는 점에서 판타지라 부른다면 '웰컴투 동막골'이나 '공동경비구역 JSA',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아주 잠시나마 그려낸 그 환한 판타지가 어찌 아름답되 슬프지 않을까.


그래서 이들이, 이 땅의 모든 아프고 힘든 이들이, 그 아픈 현실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경험은 견딜 수 없이 힘들다. 내 것처럼 아주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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