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근 기자 qwe123@
1998년 핑클로 데뷔한 지 11년째, 성유리는 이제 배우다. 처음에는 떠밀려서 걸었던 배우의 길이 이제 성유리에겐 걸어가야 할, 걸어야만 하는 길이 됐다.
길은 순탄치 않았다. 가시밭길이었고 상처투성이로 피를 철철 흘렸다.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지만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궁금증은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 22일 개봉하는 '토끼와 리저드'(감독 주지홍)는 성유리에게 도전이었다.
'쾌도 홍길동'으로 연기력 논란을 막 딛고 일어난 그녀는 자신과 정반대 캐릭터를 택했다. 성유리는 '토끼와 리저드'에 어릴 적 해외에 입양돼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여인을 맡았다. 밝고 명랑했던 이미지에서 짙은 어두움을 담은 여인으로 변신했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성유리는 출연료마저 반납했다. 왜 성유리는 또 다시 힘든 길을 걸으려 할까?
-소속사와 재계약을 한 뒤 선택한 작품이 '토끼와 리저드'였다는 게 의미심장한데.
▶'타인의 취향' 같은 어두운 영화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그런데 항상 들어오는 작품은 밝고 쾌활한 역이었다. 나도 모르는 내 아픔을,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이 시나리오는 배우가 채워나가야 할 몫이 많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할텐데.
▶10년전부터 나를 봐오던 팬들이 낯설지만 새롭다고 하더라.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는 평도 있었고. 그 이상의 칭찬은 없는 것 같다.
-이번 영화로 부산영화제를 처음 갔는데.
▶너무 기대를 했는데 일만 했다.(웃음) 노출이 심한 파격드레스를 입어 이슈화를 노려볼까도 생각했는데 영화 정서상 무난한 옷을 입었다.(웃음)
-대사도 별로 없고 여백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 많아서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흘러가는 대로 연기를 해야 해서 제대로 하고 있나 불안하기도 했다. TV 드라마는 짧은 시간에 감정을 보여줘야 하니깐 '엣지'를 줘야 하지만 영화 연기는 또 다르니깐. 감독님이 모니터도 못 보게 했다.
그런데 장혁 선배가 그러더라. 영화는 120%를 보여주려 하면 오히려 리얼리티가 떨어질 수 있다고. 슬픈 일이 있어도 24시간 울지 않는다, 영화는 울지 않는 23시간을 보여줘야 할 때가 있다고 하셨다. 많은 힘이 됐다.
-큰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연기를 본 소감은.
▶처음에는 아쉬운 것만 보였다. 글쎄 나와 안맞은 옷을 입으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던 만큼 아쉬움은 있지만 나름 잘 표현한 것 같다. 사실 극 중 캐릭터는 실제 나와 가장 비슷하다. 그래서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우란 수식어를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나.
▶배우란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아직 망설이는 부분이 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엔 힘겹기만 했다면 이제는 그런 생각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영화에서 도마뱀 흔적은 상처이자 사랑의 흔적이다. 성유리에게도 그런 게 있다면.
▶핑클의 성유리가 그런 것 같다. 끊임없이 힘들게 해 상처를 입히면서도 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핑클 성유리라는 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식어가 나를 주목받게 해줬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극복하고자 하게 만들어줬고. 뭔가를 다 내려놓게 됐고 연기를 진짜로 좋아하게 됐다.
이명근 기자 qwe123@
-연기자의 길을 포기하려고도 했다던데.
▶낙심의 끝에 다다랐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잘못된 길을 걷는 걸까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보자고 생각했다. 2년을 공백 기간 갖다가 '어느 멋진날'을 했다. 내가 함께 하는 일원이라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꼭두각시가 아닌 연기 자체를 즐기게 됐고. 그 다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도 저 사람들에 인정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게 목표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쾌도 홍길동' 이후 비슷한 캐릭터로 더 안정적으로 갈 수도 있었을텐데.
▶'쾌도 홍길동'은 처음으로 연기하면서 칭찬을 받은 작품이다.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됐고 나를 믿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태양을 삼켜라'는 여자 냄새를 풍기는 역을 해보고 싶었다. '토끼와 리저드'는 내 이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아직 더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첫 드라마는 '나쁜 여자들'이었고 첫 출연영화는 '긴급조치 19호'였다. 첫 경험은 상처뿐이었는데 이후 터닝 포인트를 계속 갖게 됐는데.
▶'토끼와 리저드'도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흥행과는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보여줬으니깐.
-예전에 비해 말하는 게 무척 신중해졌고 사려 깊어졌는데.
▶예전에는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말할 기회도 별로 없었고. 최대한 말을 적게 하고 실수를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점점 편하게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다. 예전에는 정형화된 답을 내놨다면 이제는 내 생각을 잘 표현하려 한다.
-마치 연기자 성유리의 길과도 닮은 것 같은데.
▶그렇다. 예전에는 스캔들이 나면 범죄를 지은 줄 알았다. 지금은 편해졌다. 뭐 이젠 이슈메이커도 아니고. 소녀시대가 스캔들이 나면 비교나 되겠나?(웃음) 이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연애도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다. 연기도 마찬가지고.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고 싶나.
▶내 나이 또래 현실감이 묻어나는 역을 해보고 싶다. 바람이 있다면 영화였으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