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혁 ⓒ이명근 기자 qwe123@
아마 그가 군대를 다녀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배우 장혁(33)에게서 달라진 향취를 느낀 건. 진한 남자 냄새는 여전했지만 어깨며 눈에 가득 들어갔던 힘이 어느새 빠졌고, 어딘지 더 섬세해졌다. 드라마 '고맙습니다', '불한당', '타짜', 영화 '오감도', '토끼와 리저드', '펜트하우스 코끼리'까지. 2007년부터 쉼 없이 이어지는 작품에서 보듯 배우로서 그의 활동도 더욱 바빠지고 폭넓어졌다.
특히 올해엔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내놓으며 한창 그 피치를 올리는 중이다. 다음 달 개봉을 앞둔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그 마지막 영화. 각기 다른 세 남자의 위험하고도 파격적인 사랑을 담은 이 작품에서 장혁은 지나간 사랑에 집착하는 사진작가가 됐다.
장혁이 이 만만찮은 사랑 이야기에 끌린 건 시나리오의 몽환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댄스 오브 더 드래곤' 촬영차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읽은 시나리오의 마지막 감상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같았다. 장혁은 그 느낌을 몽환적이고 조금은 위험한, 30대로 넘어가는 성장통에 빗댔다. 마음을 굳히게 한 건 장혁을 보겠다며 당장 싱가포르로 날아 온 정승구 감독이었다. 뭔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래서 시작했다. 베드신도 해냈다.
"수위가 많이 높지는 않아요. 필요한 신이라면 해야죠. 사실 살인하는 연기가 잠 한번 자는 것보다 더 무거운 거예요. 그 극적인 걸 해내는 건 작품과 맞고 충분한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고요. 베드신은 말할 것도 없어요. 수위가 더 높다 해도 할 의향이 있어요. 단 조건은 있어요. 이유가 합당하다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할 생각이 없어요."
배우 장혁 ⓒ이명근 기자 qwe123@
'나쁜 남자 역은 많이 했어도 사랑에서만은 순정파가 아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장혁은 다만 이기적이었을 뿐이라며 "사랑에 대해서는 순정파"라고 답했다. 그건 영화 속 인물만이 아니라 배우 장혁 스스로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는 사랑도 신뢰에서 시작하는 거라고 강조했다. 설렘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엔 서로의 노력과 배려가 필요한 거라며. 지난해 아들까지 먼저 얻은 후 뒤늦게 결혼식을 올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의 결혼 스토리가 궁금했다.
"2004년에 군대 갈 때가 아마 4∼5년 정도 만났던 때였나 봐요. 차마 기다리라는 말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땐 저 하나만 잡고 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기다리라고는 못하겠는데, 기다린다면 우리 결혼하자. 그게 다예요. 물론 의리로 결혼한 거 아니에요. 당연히 느낌이 있었고, 후회 없는 제 선택이자 책임이었고요."
장혁은 결혼하고 나니 진지하던 것이 담백해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항상 진지하기만 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야 할 때를 알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30대의 가장이자 배우로 그는 삶과 연기 모두에서 균형을 잡고 싶다고 말했다. '30대'는 그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가장 자주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장혁은 "늘 꿈꾸던 나이대가 바로 30대 중반에서 40대였다"며 "그 나이에 있는 남자로서의 멋스러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대에도 저 늘 진지했고 노력도 했어요. 그런데 20대가 정확하게 표현은 하지만 인위적으로 깎아낸 듯한 느낌이라면 30대엔 뭔가 모서리가 몽글몽글해진 것 같아요. 20대엔 10개가 있으면 다 표현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할까. 요즘엔 서넛만 여유있게 표현하려고 하는 거죠. 그럼 그 이상을 주변에서 더 해주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하면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밸런스를 잘 잡는 배우이고 싶어요."
배우 장혁 ⓒ이명근 기자 qwe123@
영화 개봉을 앞둔 장혁은 현재 KBS 드라마 '추노'를 한창 촬영 중이다. 지체 높은 양반이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쫓다보니 어느새 첫손에 꼽히는 노비 추격자, 추노꾼이 된 인물이 그의 몫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힘든 촬영을 하고 있지만, 장혁은 그것이 늘 꿈꾸던 캐릭터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대부'의 테마가 어울리는 남자요. 자기에게 소중한 걸 지키려 했을 뿐인데 더 외톨이가 된 남자, 하지만 그걸 견뎌야 하는 남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여명의 눈동자'예요. 전 그게 리메이크 된다면 몇백, 몇천 대 일 오디션을 보고서라도 최대치 역을 하고 싶어요."
그가 첫 드라마 '모델'로 데뷔한 지 벌써 12년. 장혁은 그간 하얀 머리의 댄스 가수로, 순정파 남편이자 아버지로, 30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배우로 변화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론 다른 게 없다"고 했다. 잘 안 변하는 게 장점이라고도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장혁은 십수년 째 같은 소속사에 몸담고 일하고 있다.
"인생은 비슷해도 조금씩 변해요. 시각도 달라지고 변화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죠. 취향이나 느낌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게 현장에서 느끼는 생생함, 그 에너지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내가 왕년엔 말이야∼'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때를 생생하게 가져가고 싶어요."
장혁이 손바닥을 한 번 만져보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굳은살이 손바닥 가득히 배겨 있었다. 양 손을 마주 문지르며 장혁은 흐뭇해했다. "일은 이렇게 해야 된다"며. 그 손바닥이 늘 같은 모습으로 노력하는 장혁을 조용히 말해주는 것 같아 그가 손을 치울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봤다.
"무술도 하고, 운동도 하고, 승마도 하고…. 열심히 하면 굳은살이 생기고 멍이 들고 땀이 차죠. 그 땀을 씻을 때의 개운함이 좋아요. 작품이 끝나면 이 굳은살도 가시겠죠. 괜찮아요. 다음 작품 때 다시 굳은살이 생기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