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기자 photoguy@
때로 코믹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진지한, 때로 철없는 사내가 따로 없지만 때로는 최고의 로맨티스트가 되는 사람.
인기리에 종영한 MBC 드라마 '동이'의 숙종은 지진희(39)에게 퍽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히트 드라마 '대장금'을 거쳐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수', '집나온 남자들', '평행이론',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 등을 거쳐 온 그의 다양한 모습을 매력적으로 녹여냈다고 할까.
숙종 또한 지진희를 만나 또 다른 매력을 얻었다. 향긋한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지엄한 대신들의 호령 속에서 방황하던 여느 사극 속의 숙종은 코믹한 '깨방정 숙종', 가슴저릿한 '멜로 숙종'으로 다시 태어났다.
'동이' 60부 대장정을 막 마친 지진희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홀가분한 듯 기분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아직 열심히 '동이'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대장금'이 54부, 60부인 '동이'는 최장 출연작이다. 이렇게 야외 촬영이 많은 왕은 처음이라는데.
▶맞다. 이렇게 야외 촬영이 많은 줄은 몰랐다. 많아야 뜰, 궐 앞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왕은 밖을 나간다. 임금이 밖에 나가면 공식행사가 아닌 다음에야 밤이 아닌가. 거기까진 몰랐다. 너무 힘드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 실제로도 숙종이 원래 암행을 많이 했다더라. 밖에 딴 뭐가 있다 할 정도로.
-'깨방정'이란 별명을 얻은 숙종은 '동이'에서 가장 혁명적 캐릭터이기도 했다.
▶약간은 안타깝다. 동이라는 큰 기둥이 있고 제가 즐거움을 잠깐 주는 요소, 탄력을 주는 요소여야 하는데 너무 부각되는 게 아닌가 해서 자책감도 있었다. 과한 게 아닌가 해서. 저한테 나쁠 거야 없었지만.
-결방 위기처럼 외적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굉장히 힘들다. 드라마 찍으면서는 사실 그런 고민을 안해야 되는데. 촬영을 계속 못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덕분에 배우들끼리 더 친목을 도모하게 됐다. 운동 갔다가, 맛집 갔다가, 침도 맞으러 가고, 노래방까지. 풀코스로 놀았다. 참, 낮술 모임은 또 다른 모임이다.(웃음) 함께 출연하는 사람들이 친구같다. 드라마 찍으면서 이러기가 힘든데, 그래서 더 편하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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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주와의 연기는 어땠나?
▶쟤는 인간이 아니다 싶다.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으면서, 도인같이 '동이'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단 한번 아프지도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고, 지각 한 번이 없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인간이 이럴 수가 없다. 저는 다만 그 옆에서 도와주고 힘이 되고 싶었다. 단점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하면 이야기하겠다.(웃음)
호흡이 잘 맞았는데, 저만의 노력이 아니라 효주의 노력이기도 하다. 클라이밍 운동을 하며 느낀 게 균형이 제일 주요하다는 거다. 살면서도 그게 제일 중요하고, 연기도 마찬가지다.
-'대장금'을 함께 했던 이영애와 한효주를 비교한다면?
▶제가 감해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가 후배고 어리다고 평가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몫이고 자기가 겪고 넘어가야 할 몫이지. 하나 공통점은 둘다 위대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저 같으면 못했을 거다. 저같으면 동이나 장금이 역할 못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완벽하게 해내더라. 위대하더라.
이영애씨 경우에는 제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스케줄도 그렇고, 내성적인 성격이시라. 또 나이는 동갑이지만 한창 제가 신인이라 감히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다. 반면 효주 같은 경우에는 제가 연장자고 오히려 이야기하기가 쉬운 부분이 있었다. '대장금'에 비해서는 붙는 신도 많아서 친해질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긴 드라마가 끝나면 어떤 기분인가.
▶공허함? 그런 느낌이 크게 온다. 아픈건지, 우울증인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이상하다. 환경이 변하니까 내가 여지껏 뭐했나 생각이 들고, 내가 이러려고 했나, 여러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일이다. 그래서 저는 운동도 한다. 그것도 힘들어서 쓰러질 정도로. 잊기 위한 것도 있고, 다음 작품의 준비이기도 하다. 그렇게 운동을 해도 작품이 하나 끝나면 완전히 소진되기도 한다. 사실 안 좋은 선택을 하는 배우도 있지 않나. 내가 이럴 정도면 감수성이 예민한 다른 배우들은 더 심하게 그럴 수도 있을 거다.
ⓒ이동훈 기자 photoguy@
-'동이'는 지진희의 진면목을 보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아직이다. 멀었다. 끝이 아니다. 힘이 많이 빠진 건 바랐던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분들이 못 보셔서 그렇지 영화에서는 더 했는데. 그건 저의 장기적인 목표이기도 하고, 이젠 더 디테일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가지를 한 번씩 해 본 것이 그냥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쌓이고 있어서 숙종이라는 캐릭터가 나왔고, 이후엔 숙종이란 캐릭터가 더해져 또 다른 게 올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게 올까, 어떻게 할까, 저도 기대된다. 그것이 저는 기쁘다. 나는 내 10년 후가 더 기대가 된다. 좀 더 나아지고 싶고, 잘 하고 싶다.
-미식가로 잘 알려졌는데.
▶안주가 맛 없으면 술도 안 먹으니까. 하지만 그건 옛날 얘기고 지금은 잘 먹는다. 고기에 비유하자면 양념고기에서 살짝 양념, 소금 고기에 이어 생고기 단계다. 고기도 아무 것도 안 찍고 먹는다. 본연의 맛이 있다. 최대한 조리 안한 걸 먹는다. 건강식이 입에 맞는다. 햄버거 안 먹은 지 꽤 됐다. 적어도 2002년부터.
-음식 조절은 일종의 자기 관리이기도 하다.
▶사실 장난 아니고 미치겠을 때도 있다. 스트레스 받고 짜증나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나아진 거다. 수염을 붙이면 우적우적 씹고 할 때 다 떨어진다. 그래서 작은 에너지바를 먹고 했다. '동이' 찍으면서 살도 빠지고 몸이 좋아졌다. 힘든 상황을 장점으로 승화하는 거, 그게 저의 장점이다. 기왕 먹는 것 맛있게 먹고, 기왕 하는 것 재밌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