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균 기자
2006년 '가족의 탄생'은 불과 27만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영화 관계자들에 엄청난 호평을 샀다. 심리묘사의 탁월함은 김태용 감독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갖게 했다.
김태용 감독이 '만추'로 다시 관객과 만난다. 이만희 감독의 1966년 '만추'의 세 번째 리메이크다. 남편을 살해한 후 감옥에 간 여자가 72시간 동안 특별휴가를 나왔다가 버스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만추'는 늦가을이란 시간과 안개 자욱한 시애틀이란 공간, 72시간 안에 감옥으로 돌아와야 하는 여인 애나와 바람난 유부녀 남편에게 쫓기고 있는 제비 훈이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그렸다.
원작 '만추'가 갈 곳 없는 사회를 담았다면 김태용의 '만추'는 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그렸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을 확정한데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까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태용 감독을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버전과 개봉 버전이 미묘하게 다르다. 늦가을이 주는 정취가 2월 개봉으로 계절이 주는 감흥이 바라져 아쉬운 부분도 있는데.
▶개봉 시점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봉을 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이다. 부산 버전과 구조는 똑같다. 음악이나 CG, 극 중 무성영화 장면 같은 것을 좀 바꿨다.
-'만추' 리메이크를 그것도 한국과 중국 배우에 미국에서 찍는다는 생각은 어떻게 했는지.
▶이주익 보람영화사 대표에게 처음 제안을 받았다. 이만희 감독님 작품은 못봤지만 김수용 감독님과 김기영 감독님 리메이크는 봤다.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나온 여자가 72시간 동안 사랑에 빠진다는 영화 그릇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명상하듯이 영화를 구상했다. 왜 여자가 감옥에 가야 했는지, 어떻게 남자와 만났는지. 이 남자는 뭐하는 사람인지. 둘이 만나 욕망을 나눌지, 연민을 나눌지, 둘이 무엇을 약속했을지.
-시작과 끝이 여인의 클로즈업인데. 오프닝 시퀀스는 여인의 얼굴 클로즈업을 통해 반전을 주고, 엔딩은 여자의 롱 데이크로 긴장을 주는데.
▶여자가 그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는 애나라는 여자의 마음을 따라가는 영화다. 클로즈업으로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 보여주고 싶었다.
-'색,계' 탕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이주익 대표가 탕웨이가 어떠냐고 제안했다. '색,계' 이후 어떻게 성장했을 지 궁금했고. 워낙 매력적인 배우니깐. 현빈 역시 이주익 대표 제안이었다. 어떤 배우인지 잘 몰랐는데 만나보니 이 영화와 잘 어울렀다. 제비지만 느끼하기보단 다정하고 자신도 상처받은 남자. 두 배우를 만나 캐릭터도 달라졌다.
-늦가을이 배경인데 낙엽보다 안개를 택했는데.
▶늦가을은 시간이자 공간의 의미, 인생의 의미를 갖고 있다. '만추' 원작보다 몇십년이 지났는데 낙엽보단 다른 것으로 늦가을을 보여주고 싶었다. 둘의 만남이 건조하기보단 축축한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애틀이란 공간에 축축한 느낌을 안개로 가자고 했다. 중간중간 해가 비치는, 그리고 안개가 걷히고 남자가 사라지는 게 안개라는 장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배우들, 그리고 다른 나라 스태프와 작업을 했는데.
▶배우들이 굉장히 순해 티격태격하는 게 없었다. 배우들과 미리 만나 장점과 단점을 미리 봤기에 그런 것 같다. 또 그 배우가 뽑아내는대로 믿는 편이다.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은 말을 잘하면 말 속에 숨을 수 있다. 그래서 문화와 말이 달랐기에 갈등이 덜 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임성균 기자
-동선을 연극 리허설 하듯이 하나하나 연습했다고 하던데. 베드신이 있었지만 탕웨이와 작업하면서 수정했다고도 하고.
▶탕웨이와 작업하면서 노출 수위는 이미 정했다. 이 영화는 베드신으로 풀어가야 할 것 같지도 않고. 마지막 키스 장면도 원래 베드신이나 키스신 중 모호하게 시나리오에 썼다가 키스신으로 결정했다. 리허설은 한국보다 일정이 타이트해서 미리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감정을 미리 많이 이야기했으니 현장에서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베드신 같은 극적인 상황이나 사건이 없다보니 담담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기획부터 감정적인 정사신 등 감정 이동을 더 세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담담하고 아련하게 그리는 게 더 슬플 것 같았다.
-현빈으로 '만추'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지만 현빈에 대한 팬덤이 영화에 대한 몰입을 떨어뜨릴 수 있는 '현빈딜레마'에 빠졌는데.
▶소박하게 지켜봐야 하는데 그런 우려가 있는 건 사실이다. 현빈에 기대치가 크다보니 격정적인 것을 기대할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보러오게 하는 힘만큼 다른 관점에서 관객들이 봐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시애틀을 함께 떠나면서 영화가 끝나면서 잔향을 남기기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엔딩을 만들었는데.
▶그럴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약속을 만들고 싶었다. 약속을 한 뒤에 둘의 감정이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다. 관계가 주는 약속이랄까, 그래서 베드신이든 키스신이든 시나리오에 모호하게 쓴 것을 키스신으로 풀어냈다.
-현빈 목욕신에서 드러나듯이 훈 역시 소통을 못하는 남자였지만 애나와 함께 하면서 소통하는 기쁨을 알게 된다. 애나가 중국어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훈이 못알아들으면서도 좋다 나쁘다 이야기한 게 인상적이었는데.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는 게 꼭 말이 통해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깐. 이 영화는 마음을 많이 탄다. 사건에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니깐.
-극 중 극으로 표현되는 변사 장면은 환상적이지만 이야기 전개를 끊을 수도 있는 장치이기도 한데.
▶둘이 유치한 장난으로 마음을 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인 상황보단 감정으로 묶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감정을 확산시키고 영화 외연을 넓혀주는 장치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