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홍봉진 기자 honggga@
대단하다. 이미 하늘을 찌른 '세시봉 친구들' 인기가 그칠 줄 모른다. 요즘 아이돌그룹 부럽지 않다.
'세시봉 친구들'은 잘 알려진 대로 지난 2009년 7월15일 조영남이 최유라와 함께 진행하던 MBC 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을 초청하면서 시작됐다. 이른바 '70년대 포크가수 5인의 40년 우정 첫 무대'였다.
이후 2010년 9월20일 MBC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가 이들로 추석특집을 꾸미면서 이들의 인기는 다시 불붙었다. 이 방송에서 처음 '세시봉 친구들'이란 이름이 사용됐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이었던 무교동의 세시봉에 이들이 자주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MBC는 올 들어서도 1월31일, 2월1일 설특집으로, 그리고 지난 2월27일에는 설특집 미방송분을 포함해 180분짜리 특집 방송콘서트를 내보냈다. 그만큼 세시봉 친구들의 인상이 시청자들에게 아주 강했던 것이다.
멤버 중 막내인 김세환(64)씨를 최근 그의 서울 서초구 양재동 자택에서 어렵사리 만났다. 거짓말 안보태고 거의 1분마다 한번씩 울려대는 휴대폰이 요즘 그와 세시봉 친구들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우선 6월말까지 매주 금, 토요일에는 수원 청주 의정부 울산 안양 포항 춘천 일산 서울 제주 김해 등 지방공연이 빼곡하다. 7월에는 뉴욕 시애틀 달라스 LA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미국 공연이 열린다. 이 사이, 일본 크루즈, 지중해 크루즈 일정까지 있다.
공연 멤버는 조영남을 빼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그리고 초창기 트윈폴리오 멤버일 뻔했다가 군입대로 무산된 이익균씨. 이씨는 최근 방송분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선보여 좌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회는 세시봉 초기 MC였던 방송인 이상벽이 맡는다.
"바쁩니다. 아주 바빠요.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생각도 들어요. 계속해오던 (음악) 생활인데 갑자기 여러분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MBC에서 계속해서 방송을 한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우리 입장에선 고맙죠."
MBC '놀러와'의 '세시봉 친구들' 특집
-감회가 어떠세요?
▶다들 60대 중반을 넘었으니 멤버 중 한 명이라도 아프면 언제 다시 하겠어요? 그러니까 이장희도 비행기를 타고 넘어온 거죠. 하여간 얼떨떨합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전화오고 그러니까.
-음악활동은 계속 해오셨잖아요?
▶80, 90년대에도 계속 우리 나름대로 활동을 했죠. 연말엔 디너쇼도 하고. 물론 관심이야 지금보단 덜했죠. 노래를 오래 해보니까 '팬들과 함께 늙어간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때 잠시 일식집을 해본 적이 있는데, 길을 두고 산을 갔던 거죠. 내 갈 길은 식당이 아니고 노래를 해야 했던 거였죠. 우리 시절의 팬들을 위해. 그런데 기자양반, 뭐 하나 물어봅시다. '세시봉'이 왜 인기라고 생각해요?
-2, 3년 동안 아이돌에 싫증난 대중이 세시봉 친구들에게서 오히려 참신함을 본 게 아닐까요? 추억이나 복고 열기도 한몫했던 것 같고요.
▶잘못 짚었어요. 그건 우리가 팝이면 팝, 트로트면 트로트, 모두를 방송에서 보여줬기 때문이에요. 동요에 아카펠라까지. 복고, 뭐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우린 다 할 수 있으니까. 특히 젊은 시청자들이 열광한 것은 우리가 유학파도 아닌데 팝송을 다하고, 60세 넘은 '꼰대'들이 아카펠라까지 하니까 놀란 거죠. 총 40곡을 불렀는데 팝송만 5곡이에요. 다양한 장르와 노래, 여기에 화음까지 척척 넣으니까 감동을 받은 거죠.
-맞습니다.
▶복고, 그러니까 그런 거 따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추억을 팔아먹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방송에서 했던 '닐리리 맘보' 기억나죠? 내가 노래 막판에 트로트를 뒤집었다니까(이날 방송에서 김세환씨는 트로트 특유의 꺾는 음을 코믹스럽게 표현, 방청석의 갈채를 이끌어냈다). 이게 다 신중히 레퍼토리를 짜서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다음에 또 하면 레퍼토리 다 바꾸고 해야죠.
(이와 관련 대중문화 평론가 강태규씨는 이들의 인기를 "콘텐츠의 승리"라고 분석했다. 추억이나 복고 때문이 아니라.)
-음악감상실 세시봉 얘기도 들려주세요. 72년 월간팝송이 주최한 한국팝스그랑프리 시상식에서 포크송 부문 최우수 남자가수상, 양희은씨가 여자가수상 받았던 당시 얘기도요.
▶사실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70년대 초반엔 세시봉은 문 닫았고 대신 오비스 캐빈이 전성기였죠. 나야 세시봉 말년에 살짝 걸쳤던 것이고. 당시 오비스캐빈에는 양희은과 내가 자주 나갔죠. 월급이 25만원인가 그랬지, 아마?
김세환 ⓒ홍봉진 기자 honggga@
-그럼 데뷔는 어떻게 하신 거에요?
▶1969년 TBC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 나가 팝송을 불렀어요. 경희대 대학팀으로 참가한 건데 입상은 못했어요. 그러면서도 대학교 축제 때 불려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경희대 신방과에 노래 잘 하는 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때 당시 경희대 의대 재학중이던 윤형주가 이종환씨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데리고 나갔던 겁니다.
-그래서요?
▶그 프로그램에서 비지스의 '돈 포겟 투 리멤버'를 불렀는데 이게 인기가 좋았어요. 엽서 신청곡이 김세환의 '돈 포겟 투 리멤버'일 정도였으니까. 이종환씨도 놀랐죠. 그래서 판(LP) 앞면에는 윤형주의 '라라라'를 싣고, 뒷면에는 '돈 포겟 투 리멤버'를 번안한 '잊지 못할 사랑'을 실어 정식 데뷔한 거죠.
-197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선생님 전성기였죠. 72년만 해도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신인상(대상은 나훈아 하춘화, 여자신인상은 정미조) 수상을 하셨고, 하춘화와 함께 뮤지컬 '우리 여기 있다'에도 출연하셨습니다.
▶방송에서 처음 상을 탄 게 그 상이에요. 그때 후보에 올랐던 송대관씨가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어요. "아 느그들 통기타 애들 때문에 내가 10년은 늦어버렸다~잉."(웃음) 뮤지컬 출연은 저도 정말 놀랐어요. 대선배 하춘화와 동급이 된 거니까. '나도 많이 올라오긴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74년 드디어 TBC 방송가요대상을 받으셨죠. MBC에선 10대 가수에 선정됐고요.
▶수상곡이 '좋은 걸 어떡해'였죠. 사실 저만큼 고생 안한 가수도 없을 거예요. 운도 좋았고. '좋은 걸 어떡해' 이 노래도 오비스캐빈에서 처음 윤형주가 불렀던 곡인데 "형, 이 노래 나한테 주라" 해서 제 노래가 된 거에요. 녹음할 때 윤형주씨가 기타도 쳐주고 화음도 넣어주고.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요즘 젊은 친구들 음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젊은 애들 음악, 좋은 거 많죠. 어차피 유행가라는 게 그런 거니까. 내 노래가 중요하면 상대방 노래도 존중해야죠. 우리 것만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노래라는 건 시대 따라 흘러가는 거니까. 내 입에 쓴 약이 나쁜 게 아니니까. 이번 세시봉 친구들 인기도 두 세대간의 교감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