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희 KBS 아나운서 ⓒ사진=유동일 기자
"아나테이너요? 아나운서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져야죠."
1977년 KBS 공채 4기 아나운서로 방송 활동을 시작, 올해로 34년째 마이크를 잡고 있는 박경희 아나운서(57). 지상파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현역에서 일하고 있다.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KBS 아나운서 실장을 맡아 KBS 아나운서들을 이끌었던 그는 현재 실장을 마치고 아나운서위원으로 후배들에게 든든한 선배로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박경희 아나운서는 요즘도 매일같이 오후 4시 라디오뉴스를 진행하고 있다. 뉴스를 앞두고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그를 만났다.
◆1977년 KBS 공채 4기 아나운서로 방송 시작.. '34년차 最古 아나운서'
그에게 "30년 넘게 현역 아나운서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묻자, "별다른 비법이라고 할 건 없다"고 했다.
박 아나운서는 "평생 목소리 관리는 따로 안했다"며 "목소리가 중저음에다 음역폭이 넓은 것도 도움이 됐다. 일상생활에서 따로 '관리'라고 할 게 있다면, 술·담배를 안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술·담배는 성대에 무리를 줘 목소리가 생명인 사람들은 절대 피해야할 것들"이라고 했다. 이어 "50살이 넘어서도 뉴스를 하려면 규칙적인 생활도 필수"라고 덧붙였다.
◆"아이 돌봐준 친정어머니 덕에 오랜 사회생활 가능"
여성으로 30년 넘게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그의 어머니다.
"후배 여자 아나운서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게 육아 문제로 그만둘 때에요. 참 안타깝죠. 전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줘서 이렇게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 덕에 여자로서 아나운서 실장까지 할 수 있었던 셈이죠. 여자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또 다른 여자의 희생이 있어야 해요. 농담으로 제가 후배 여자 아나운서들에게 '은퇴하면 너희들 위해 탁아방 하겠다'고 말하곤 해요(웃음)."
박경희 KBS 아나운서 ⓒ사진=유동일 기자
최근 몇 년간 아나운서들의 '영역 외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를 조합, '아나테이너'라는 말도 생겼을 정도. 박 아나운서는 후배들의 그러한 '역외 활동'을 적극 찬성한다고 했다.
"아나운서들이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예능에 출연하는 게 근래 몇 년 새 부쩍 늘어나긴 했죠. 하지만 옛날에도 '가요대행진'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랬어요. '전국노래자랑'도 송해씨가 하기 전에 고광수, 김선동 아나운서가 MC를 맡았고요. 아쉬운 게 있다면 '아나운서의 끼'라는 개념에 대해 잘못 생각했다는 거죠. 대중들의 심리를 잘 모른 거죠. 우리는 키 크고 인물 잘 생기면 된다고 봤지만 어디 그래요? '전국노래자랑'을 아나운서가 진행하니 장마당에 모범생이 있는 것처럼 어색했던 거죠."
◆"1989년 아나운서실에 새바람, 아나운서 영역 확대는 '3실장' 공로"
80년대 초반 '아픔'을 맛 봤던 아나운서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박 아나운서에 따르면 아나운서 영역의 본격적인 확대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본격화됐다.
"올림픽 후 89년께 아나운서실에 새 바람이 불었어요. 이규황, 이장우, 김승한 아나운서들이 실장을 맡았을 때인데 이들 '3실장'이 아나운서 영역 확대를 위해 애쓰셨죠. 선배들이 전방위로 애썼고, 그 선봉장에 이계진 아나운서가 섰죠. 사실 이 아나운서가 요즘 각광받는 '까도남'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하하. 선배들이 애쓰고 본인도 노력한 끝에 '11시에 만납시다'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됐어요. 그때 '농부의 얼굴을 한 사람도 스타가 될 수 있구나'생각했어요(웃음).
박 아나운서는 "그런 선배 아나운서들의 노력 끝에 최근 들어 KBS 아나운서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것"이라며 "'1박2일'같은 리얼 버라이어티는 아니더라도 예능의 틈새시장을 후배 아나운서들이 잘 공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예능프로에 있어 아나운서들의 장점은 바로 '언어 훈련'. 이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재밌고 순발력 있게 이끌면 아나운서만의 매력이 십분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출근해 시청자상담보고서를 살피는데, 시청자들이 원하는 아나운서상이 분명있어요. 최근에 '아침마당' 김재원 아나운서가 방송 중에 '한턱 쏠게요'라고 말했다 시청자 항의를 받은 일도 있어요. 아나운서들의 영역이 좀 더 넓어지려면 그러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야겠죠. 대체로 시청자들은 남자 아나운서에게는 '반듯한 이미지의 장남'을, 여자 아나운서에게는 '푸근한 맏며느리' 이미지를 원하시더라고요. 이런 걸 감안해 틈새시장을 노려야겠죠. 다매체 다채널 시대로, 또 아나운서실이라는 '조직'이 밀어주고 있잖아요.
◆"후배들 '프리선언'은 '끼' 살리는 것..안타깝기도 해"
그렇게 밀어주는 '조직'을 떠나 이른바 '프리선언'을 한 후배들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박 아나운서는 "요즘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말로 이들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우리 때는 이 직업을 종착역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죠. 경유지로 생각하는 후배들이 많아요. 시대가 변했잖아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죠. 꼭 제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은 안 해요. '끼'라는 것은 못 말리는 거잖아요."
박 아나운서는 그러면서 꿈을 찾아 떠난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프리선언'을 한 후배 중에는 잘 자리를 잡은 친구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잖아요. 기본적으로 '오디오'가 튼튼해야 오래갈 수 있어요. 방송에 있어 기본은 뉴스거든요. 뉴스 잘했던 후배들은 나가서도 잘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정은아나 손범수 같은 후배들은 여기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K의 경우는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조금 안타까워요. 방송에서 보면 개그맨도 아니고 아나운서도 아니고 그렇더라고요. 연기자로 변신한 S도 그렇고요."
◆"매일 10분 뉴스는 이젠 '리사이틀'..이제야 '아나운서 쟁이'됐다."
1977년부터 2011년 이 순간까지. 박경희 아나운서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10분의 라디오지만 그는 이를 통해 희열을 느낀다.
"내 오디오를 가지고 승부를 걸고 있잖아요. '리사이틀'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아나운서 처음 시작할 때 선배들이 해 준 얘기가 요즘처럼 와 닿는 적이 없어요. 아나운서는 처음에는 '리딩'에서 시작했다가 이어 '스피킹'을 하고 궁극에는 '리사이틀'을 한다고들 하셨거든요. 요즘 새록새록 느껴요. 짧은 10분 동안이지만 희열과 기쁨을 느끼거든요. 박경희가 이제야 '아나운서 쟁이'가 된 것 같습니다."
박경희 KBS 아나운서 ⓒ사진=유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