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진 기자 honggga@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이시영(29)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자신보다 더 큰 헤드기어를 쓰고 링 위에 섰다. 화려한 드레스를 버리고 헐렁한 트렁크를 걸쳤다. 상대의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날리고 기뻐하다가, 쏟아지는 주먹세례에 힘겨워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해보였다. 여우주연상 트로피 대신 복싱 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그녀는 세상을 얻은 뒤 기뻐했다.
이시영은 17일 오전 11시 경북 안동시 안동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7회 전국여자신인아마추어 복싱선수권대회 -48kg급(2분 4라운드) 결승전에 출전, 성소미(16)를 상대로 3회 RSC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복싱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우승메달을 세 번째 목에 걸었다.
이시영은 지난해 여자 복싱선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막극에 캐스팅돼 복싱을 시작했다. 드라마는 무산됐지만 복싱과 인연을 이어가 지난해 11월 사회인 복싱대회인 KBI 전국 생활체육 복싱대회 48㎏급에도 출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지난 2월 서울지역 아마복싱대회인 제47회 신인 아마추어 복싱전에 출전해 우승컵을 차지했다.
연기자인 이시영이 복싱에 푹 빠진 이유는 뭘까?
연기를 위해 복싱을 배운 연기자는 꽤 있다. 하지만 취미가 아닌 일과 병행하면서 한 배우, 더구나 여배우는 없었다. 얼굴이 생명인 여배우가 자칫 크게 다치거나 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원은 '1번가의 기적'을 찍기 위해 복싱을 배우다 코뼈가 다친 적도 있다.
이시영도 그런 위험을 모르진 않는다. 주위에서도 만류한다. 사실 이번 경기는 출전이 불투명했다. 주연을 맡은 영화 '위험한 상견례'가 31일 개봉해 홍보 일정이 촘촘히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줄줄이 이어지는데 얼굴이 부어 사진을 찍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시영은 이번 대회에 맞춰 흘린 땀을 헛되게 할 수 없다며 출전을 강행했다.
지난 14일에는 안동에서 계체를 통과한 뒤 서울로 가서 영화 시사회에 참석했다. 다음 날 안동으로 내려와 대회를 준비하고 16일 경기를 마친 뒤 다시 서울에 올라가 영화 홍보를 위해 라디오에 출연했다.
이시영은 남다른 취미로 그동안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건담' 프라모델을 수집한다는 게 '우리 결혼했어요'를 통해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여느 여자라면 명품가방을 살 돈으로 건담을 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열성팬이기도 하다. 박지성 선수가 뛰고 있는 맨유가 아닌 리버풀이다. 그만큼 관심 분야가 남다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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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은 "이시영은 무엇인가 빠지면 올인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시영이 복싱에 빠진 것은 남다른 관심사에 땀은 거짓을 하지 않는다는 복싱의 매력이 결부됐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이번 경기를 앞두고 일주일에 6일 동안 체육관에서 땀을 흘렸다. 다른 여배우들이 피부 관리를 받을 때 샌드백을 두들겼다.
이시영이 언제까지 복서로 활동할지는 알 수 없다. 연기와 복싱을 지금처럼 병행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쉽게 복싱을 놓을 것 같진 않다. 매력도 매력이지만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이날 경기가 끝난 뒤 "실력이 상당하다"고 하자 "부족한 게 많은 신인 선수일 뿐"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실력에 자신이 붙을 때까지 계속 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이시영은 연기에서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평소 말하곤 했다.
이시영의 복싱스승 홍수환 관장은 "이시영의 가능성이 대단하다"며 "런던올림픽 출전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내년 열리는 런던올림픽에 여자복싱이 정식종목으로 선정됐다. 이시영이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과연 이시영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지, 어쩌면 여우주연상보다 올림픽 메달을 먼저 목에 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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