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헤만 "화나게 만드는 세상, 감성 랩의 원천"(인터뷰)

문완식 기자  |  2011.07.01 21:41
PK헤만 PK헤만


MBC '나는 가수다'가 화제다. 판에 박힌, '상품'으로의 음악에 익숙하던 대중은 정말 '노래'가 무엇인지, 그러한 노래를 듣는 기분이 뭔지를 알게 됐다.


'랩뮤직을 하는 사람'. '래퍼(rapper)'의 사전적 정의다. 랩을 정확히 뭐라고 정의하기는 사실 어렵다. 그 세계를 모르는 일반 대중으로서는, 리듬이 실린 이야기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파란만장하다면? 랩 그리고 래퍼는 달리 다가 올 것이다. 마치 '나가수'처럼.

'감성 래퍼'로 유명한 PK헤만(PK Heman, 31, 본명 김지환)도 그랬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랩, 그의 음악이 달리 들린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무적의 PK헤만'..'일진'이었던 중고교 시절

PK헤만은 중·고교 시절, 이른바 '일진'이었다. 농구, 축구 등 운동을 원해 좋아했지만 권투를 알고 나서 '주먹'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광선 선수, 동양챔피언 변정일 선수 등등 쟁쟁한분들이 매일 땀 흘리고 트레이닝 하는 곳이었죠. 저 운동하는 거 보더니 가능성이 있다면서 직접 지도도 해주셨고요. 재미가 붙어서 꾸준히 하다보니까, 동네 펀치기계 기록은 다 세우고 다닐 정도로 주먹이 세지더라고요(웃음)."

그렇다고 무작정 힘 자랑, 주먹 자랑을 한 것은 아니다. 담배를 피며 몰려다닌다거나하는 학생답지 못한 친구들을 '손 좀 봐줬다'. 하지만 그는 랩을 알게 되면서 '주먹'의 세계를 떠났다. 물론 '대가'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꿈'을 위해 그는 참았다.

"어린나이에 꿈을 빨리 정한 게 큰 힘이 되었던 거 같아요. 참으세요. 참고 묵묵히 자기 할 일 정진하면 나중에 정말 좋은 결과 오더라고요. 어른들 말씀 틀린 거 몇 개 빼고는 없는 것 같아요(웃음)."


이태원에서 옷을 팔며 랩과 영어를 배우다

'운명'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춤추는 게 좋았고, 춤을 위한 옷을 사러 이태원에 들렀다 랩에 빠지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춤추는 게 너무 좋았어요. 대학로(혜화동)가 꽤 유명했거든요. 우리 또래 아이들에게는 거기서 음악 틀고 춤추는 게 로망이었죠(웃음). 그런데 옷도 좀 중요한 시기였어요. 의상을 사러 동대문 문정동 이런 곳 들추고 다니다가 이태원이라는 동네를 알게 됐죠."

이태원을 접한 PK헤만은 랩, 힙합에 빠지게 된다.

"조금 추운 겨울이었는데 옷 살 돈 없어도 그냥 호객 행위 하는 형들 구경하는 것도 큰 재미였어요. 그 당시 이태원은 정말 힙합, 그 자체였거든요. 옷가게 골목골목 사이에서 화려하고 단순하면서도 멋진 옷을 입고. 아무튼 그 형들 비트박스하면 옆에 있는 형들은 프리스타일 랩하고 어떤 사람은 거기 맞춰서 자유롭게 춤추고 있고 너무 멋지더라고요. 그 골목을 지나가다가 흘러나오는 음악한곡에 발길을 멈추게 되었죠. 그게 바로 2pac의 'I ain't mad at cha"였어요."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다 듣고 서있었다.

"이거구나. 아, 이거구나 내가 평생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멋진 일이 이거구나, 그때부터 시작된 거죠."

하지만 그 당시 그를 홀렸던 노래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그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영어가 필요했다.

"랩을 듣다보니까 가사도 궁금하고 해석을 하자니 속어도 너무 많고 그 당시에 인터넷은 이런 초고속이 아니라 전화선을 연결해서 모뎀을 사용해 쓰던 시대라 해석은 둘째 치고 가사 하나 구하기도 너무 힘들었어요. 방법은 영어를 빨리 배워서 외국인 친구들과 친해지는 거였죠. 특히 흑인형제들이요(웃음).

덕분에 강북 끝자락에서 초중고를 나왔지만 회화를 빨리 하게 되었죠. 선생님들이 구식영어를 가르치면 '요즘 그 표현 안 써요 선생님'하면서 반대로 가르쳐 드릴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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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서 옷 장사로 15살에 월 500만원 수입

영어가 어느 정도 능숙하게 된 PK헤만은 '외국인의 천국' 이태원에서 승승장구했다. 잘 벌 때는 한 달에 400~500만원을 벌기도 했다. 15살 때였다.

"영어가 늘어가다 보니까 손님 층이 다양해졌어요. 그러다보니 매상도 많이 올랐어요. 멋대로 해도 사장님이 오냐오냐 할 정도로 잘 팔았거든요. 그러다가 유명한 수입 운동 선수복 도매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영어 잘하는 게 이유였죠.

물론 그 당시에 저는 아주 풋풋하고 귀여운 외모였어요. 하하. 아무튼 도매와 소매를 같이 하다보니까 어린나이에 한 달에 400~500만원을 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주머니에 10원짜리 하나 없이 가난한 음악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돈은 좀 씀씀이가 헤펐어요."

하지만 '이태원에서 영어를 배웠다'는 말은 그를 항상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부유한 집안의 유학생친구들이나 교포친구들, 처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힙합 옷 래퍼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물론 영어로요. 갑자기 어디서 살다 왔냐고 하면.. 이태원이라는 그 말 한마디에 비웃거나 무시해 버리더라고요. 저도 반대로 비웃어 줬어요. 싸움은 제가 더 잘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비웃음'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항상 그런 것들이 문제였어요. 배경, 환경 속에서 화나게 하고 억울하리만큼 참아야 했던 거요. 결국 저를 강하게 만들어준 원천은 주위의 그런 시선과 사회의 사고방식들 뭐 이런 거였어요. 이태원은 제가 랩이란 걸 선택하기까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까지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제 학교죠."

"PK=Player Killer, 랩 잘하는 사람 잡는다는 뜻"

그는 "기획사 대표로 계시는 라이머 , MC스나이퍼, 이런 분들은 회사대표이지만 술자리나 녹음실 같은 곳에서 대화를 그냥 랩으로 한다"며 "진짜배기 래퍼들이다. 케이블이나 인터넷 같은 곳에 프리스타일 배틀 같은 게 그 때는 없었다"고 했다.

"신촌에 가면 '블루멍키즈' 홍대에 가면 '엔비'가 있었고 이태원에는 '소울트레인'이 있었죠. 그냥 누구나가 공평하고 평등한 클럽이에요. 그때 양동근씨 .허니패밀리형들. YG분들 정말 지금 보면 아실만한 분들도 쉽게 뵐 수 있는 곳이었죠.

새벽 1~2시정도가 되면 네온사인까지 꺼지고 DJ박스 옆에 핀 조명 하나만 비춰져요. 박자를 돌리면 누구나 마이크잡고 랩을 하는 거예요. 잘하고 못하고는 듣는 사람들이 알아서 조율해줘요. 하는 사람에게는 좀 더 긴 시간, 못하면 그냥 솔직하게 주위에서 바로 뭐라고 해요. 그만하고 넘기라고요(웃음)."

그러다가 그는 'PK'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미군친구들하고 잘못 엉켰다가 끌려 나가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가사에 좀 심한말로 한국 사람들 비꼬는 게 들려서 알아들을만한 단어 몇 개 넣어서 화나게 만들어준 적이 있거든요. 클럽지배인형이 잘했다면서 데킬라도 한 병 주시고 랩 하던 형들이 잘한다는 뜻으로 '플레이 킬러(Player Killer)' 라는 이름을 지어줬죠. 랩 하는사람 잡는다는 뭐 제일 잘한다는 그런 뜻이에요(웃음)."

사랑을 읊조리는 PK헤만 스타일..스토리텔링이 세상의 감성을 울리다

PK헤만은 이태원, 홍대, 신촌 등 클럽 문화를 따라다니다 굉장히 유명한 음반레이블 사장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심한 대립으로 계약파기 후에 군대에 간다.

"제대하고 나니 26살. 진짜 이도저도 아닌 나이같았어요. 힙합적인 색깔이 진한 흑인음악을 하고 싶었고, 라면 쪼개 먹으면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기 시작했죠. 꽤 유명한 레이블에서 계약이 들어올 때쯤 패기 있고 혈기왕성한 젊은 제작자 한분을 만나게 됐는데, 그 분과 계약해서 랩 발라드를 하게 됐어요. 사람일이 하루 앞을 모르는 거니까 잘한 건지 못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PK헤만을 수식하는 또 다른 단어는 '랩 발라드'다. 감미로운 그의 랩을 세상을 그렇게 평했다.

"'랩 발라드로 정상에 섰다'라고들 하는데 사실 하기도 싫고 별로 유쾌한 칭찬은 아니에요. 저는 그냥 래퍼예요. 그런 곡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제가 하고 싶은 장르는 해보지도 못했어요. 랩이 필요하다면 그 어떤 곡이던 가장 잘 맞는 가사와 플로우를 붙일 자신 있어요. 랩 발라드의 정상? 그런 건 그냥 다른 사람 줘버리라고 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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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고마운 친구..그 자체로 의리"

그는 아이돌그룹 H.O.T 출신 이재원에 대해 "진짜 의리 있는 친구"라며 고마워했다.

"정말 주머니에 10원짜리 하나조차 없을 정도로 돈이 없을 때 저를 먹여주고 차비주고 술 사주고 힘내라고 얘기한 친구에요. 제가 상황이 괜찮아져서 직접 앨범제작을 하겠다고 말하자 아무 말 없이 곡을 써서 '지환아 이곡 선물이야' 해주는 그런 친구죠."

이재원은 그에게 늘 '음악'에 대해 강조하며 흔들리는 그를 붙잡아줬다.

"제가 술이 좀 과하거나 성격이 욱하려고 할 때 '지환아 음악 계속해야지?'하며 제 정신줄 잡아주는 그런 친구에요. 나름 굉장히 강한 멘탈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그게 무너지려고 할 때 정말 저에게 큰 힘을 준 친구예요. 대부분 말을 먼저하고 행동은 상황 봐가며 하는데 이 친구는 행동으로 먼저 저를 도와주고 나중에 말하는 친구죠."

그는 이재원을 '의리'로 정의했다.

"H.O.T라고 하면 음악 하는 사람들은 뻔한 노래 그저 그냥아이돌 아니면 댄스가수

정도로 말하는데 재원이는 H.O.T에서도, JTL에서도, 그냥 이재원으로서도, 자기만의 음악세계가 있는 작곡도 잘하는 프로듀서이자 가수예요. 박자를 만들고 멜로디를 입혀서 들려주죠. 재원이의 노래들은 앞으로 세상에 나오겠지만 정말 음악을 잘한다는 느낌을 충분히 전해주고도 남으니까요. 그리고 이 녀석 천상 남자예요 털털하고 성격있는데 착하고 의리 있죠."

6월 말 싱글을 시작으로 18곡 정규앨범 작업.."국내 힙합의 의미 있는 획을 긋고 싶다"

PK헤만은 지난달 말 첫 싱글인 ''피케이 비긴즈'(PK BEGINS(피케이 비긴즈)'를 내놓았다. 그는 이번 앨범을 통해 완성도 높은 더블 타이틀곡인 ''오토매틱 러브(Automatic Love)'와 '비 위드 유(be With You)'를 선보였다. 작사와 프로듀서까지 맡았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중 하나가 '더러워서 차리고 만다', 이 말인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차렸어요. 이제는 원망할 사람도 말도, 음악에 터치하는 사람도 없어요. 대중가요 한곡을 만들어도 내가 인정하고 내가 존중하고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내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게 가장큰 행복인거 같아요."

그는 "음악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단지 좋은 음악이 나오면 다음앨범을 만들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생긴다는 정도이지 정말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면 저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거에요(웃음)."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꿈'있는 아이들에 힘이 되어주고 싶다"

PK헤만의 '꿈'은 무엇일까.

"문화 빌딩을 지을 거예요. 저같이 고생하며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무료 상담 및 트레이닝도 받게 해 주고 싶어요. 잘하는 애들은 직접 음반을 제작해주던가 유명 기획사에 오디션을 주선해주던가, 뭐 이런 식으로 꿈은 있는데 방법이나 방식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 싶어요."

녹음부스도 많이 만들어서 아이들 곡 작업한 거 데모도 녹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팀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공연 문화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주말에는 클럽도 열어서 원 없이 마시고 놀게 해주고 싶어요.

저처럼 가난한 시절, 힘든 환경에서 자란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제가 걸어야했던 잘못되고 낭비되었던 아프고 안타까운 시간들을 또 다시 걷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 아직도 실수하고 잘못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다음에 어떻게 했느냐.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그 다음에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죠.

예술이라는 꿈을 가진 연기자, 가수, 댄서, 화가 이 모든 아이들이 잘못을 하고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다음에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두려워할 때 손을 내밀어 이쪽으로 가야한다고 끌어줄 수 있는 그러한 아저씨가 되어 주고 싶어요. 그게 제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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