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 고수 "영웅보다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인터뷰)

김현록 기자  |  2011.07.20 08:33
ⓒ이기범 기자 ⓒ이기범 기자


전장의 공포에 발걸음조차 못 옮기던 이등병은 부릅뜬 눈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전쟁의 괴물이 됐다. 통금시간에 맞춰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내달리던 '박카스' 청년도 변했다. 사슴같은 눈에서 맑은 눈물을 흘리던 멜로의 꽃미남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의 남자가 됐다. 20일 개봉을 앞둔 영화 '고지전'(감독 장훈)의 중위 김수혁, 그리고 배우 고수(33)다.


'고지전'의 전장은 무의미한 죽음이 속절없이 이어지는 곳. 고수가 맡은 김수혁은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군인이다. 고수는 그것이 현실이다 생각하고 스스로를 밀어넣었다. 처음엔 무서웠고, 나중엔 무서워졌고, 결국엔 불쌍해졌다. 승자없는 전쟁에는 영웅도 없다. 고수는 '영웅'이 아닌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고 거듭해 강조했다.

-가장 치열한 여름 대전의 중심에 있는 기분은 어떤가.


▶주변 분들이나 형들이 제가 바쁠 때를 못 봤다고 한다. 놀라거나 하는 것도 못 봤다고. 사실은 속으로 하는 편이다. 제가 느긋해 보이나보다. 속으로는 관심도 있고 궁금하기도 한다. 겸손한 자신감을 보여드리고 싶다.

-'고지전'에 대한 기대가 높다. 고수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고.


▶시사회 하기 전에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걸 느꼈다. 시나리오를 보고 두말않고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처음엔 부담이 있었다. 아니, 심했다. 예산이 큰 영화고 제 역할도 컸다. 하지만 표현하고 연기하는 게 재밌었다. 하면서는 즐겁게 했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전쟁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섭다. 참혹하고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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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혁을 어떻게 그리려고 했나. 대단히 입체적인 인물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수혁이는 멋있고 강한 캐릭터에 비현실적인 이미지였다. 그걸 많이 잊으려고 노력했다. 영화적인 이미지보다는 전쟁에 참여한 한 사람의 군인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멋있는 영웅보다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 똑같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지만 전투에 나서선 또한 어쩔 수 없이 인질을 죽이고 잔혹해져야 하는 사람. 신일영 대위가 모르핀을 맞고 그 고통을 외면하려 했다면 수혁이는 그 고통마저 고스란히 마음에 쌓아두고 감내하려는 인물이라고 봤다.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멋진 영웅을 꿈꾸지 않나.

▶'고지전'은 주인공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전쟁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결말 또한 몇 가지 버전이 있었다. 생각을 해보시라. 한 겨울 내내 깎아지른 산을 수백명이 소리를 질러가며 필사적으로 오르고 또 오르고 했다. 저는 그 중 한 명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 고생이 훤히 보인다.

▶때 벗기는 데 오래 걸렸다. 깨끗하고 편안한 거랑은 거리가 먼 촬영이었다. 6개월간 그냥 산에 들어가서 뒹굴며 찍었고, 보송보송한 느낌, 솔솔 나는 샴푸냄새랑은 담을 쌓은 생활이었다. 물, 음식, 불 모든 게 귀하고 소중했다.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게 제작사 이사님이 내려주신 커피였는데, 보온병에 따라 주셨던 그 향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돌아와 일상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모든 게 감사하더라. 밤에 잠을 더 편히 잘 수 있는 즐거움이 생겼다. 추운 밤, 새벽에 비 맞으면서 돌격하다가 이렇게 잘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지. 그래도 촬영은 즐거웠다.

-남자배우들끼리의 촬영도 또 다른 재미였겠다.

▶물론이다. 몸은 힘들었지만 일 끝나면 군복 벗을 때가 기다려졌고, 저녁 먹으며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좋았다.

-고생한 경험이 다음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까?

▶아무래도 힘든 영화를 하고 나오다보니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예전보다 지문을 신중하게 보게 됐다.(웃음) '수혁이 진흙탕 구덩이를 기어가면서 은표를 찾는다. 옆에서 폭탄이 터지고 군인들이 쓰러진다' 이런 지문들. 그걸 내가 하는 거라면 더 신중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이번에 하게 됐다. '고지전' 읽을 땐 그걸 몰랐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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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봤다. 남자끼리 있을 때 넌지시 압박주고 하는 모습도 재미있더라.

▶지금까지 멜로나 사랑 이야기를 많이 한 건 사실이다. 남자들끼리 많이 있는 모습은 처음이니까 자연스럽게 그 때 모습이 보여진다는 생각은 든다. 지금 또 멜로를 하면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나오지 않을까. 진한 멜로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

-제대 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은연 중에 있었나보다. 저를 두고 바른, 착한 이런 말씀을 많이 해주시는데, 다른 모습을 보고 싶으시다면 극장으로 오시면 된다.(웃음) 같은 시간을 보내고 같은 경험을 쌓은 또래 세대가 큰 힘이 된다고 누군가 그러더라. 저도 데뷔한 지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학창시절 제가 나온 광고를 보시고 '피아노'를 보셨던 분들이 이제는 다들 결혼하시고 다 사회생활을 하시지 않나. 저도 똑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이를 먹었다. 성장, 변화, 이를테면 그런 걸 함께 겪고 있는 거다. 저를 기억하는 또래의 친구들에게 다른 제 모습을 보여드리는 계기가 돼 기쁘다. 그 모습을 반가워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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