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기자 photoguy@
하정우는 영리한 배우다. 시나리오에 활자로 죽어있는 캐릭터를 펄펄 뛰는 고등어처럼 창조해낸다. 29일 개봉하는 '의뢰인'(감독 손영성, 제작 청년필름)은 그런 하정우의 장점이 그대로 살려진 작품이다.
'의뢰인'은 자기 욕심에 충실한 변호사(하정우)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남자(장혁)의 변호를 맡으면서 진실을 놓고 검사(박희순)와 대결을 벌이는 법정 영화. 독립영화 '약탈자들'로 충무로의 주목을 받은 손영성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하정우는 활자로 된 변호사의 말투를 살려내고 손짓을 만들어냈으며 걸음걸이를 창조했다. 껄렁한 하정우표 변호사는 그의 과거 작품에서 본 듯하면서도 또 새롭다. 그는 이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국가대표'에서 호흡을 맞췄던 성동일을 법정 브로커로 추천했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고 익숙함을 더하기 위해서다. 하정우는 숲을 보면서 나무를 살릴 줄 아는, 영악한 배우다.
-하정우표 변호사를 아주 잘 만들었다. 그런데 캐릭터는 잘 살았지만 영화에서 캐릭터의 히스토리는 구축되지 못했다. 감독의 선택 문제였을 텐데, 변호사의 이야기로 끝까지 가지 않은 채 검사와 대립구도를 이루게 하면서 변호사 캐릭터의 내적 변화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검사를 하다가 그만 두게 된 베트남 신부 살인 사건이라든가 그런 부분이 편집됐으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만듦새는 상당히 매끈하고 빼어나다. '국가대표' 개봉 당시 가장 재미있게 본 시나리오로 꼽았었다. 당시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찍기 때문에 '의뢰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중단되면서 결국 하게 됐는데.
▶'황해'가 1년이 걸렸는데 감독님과 제작사가 끝까지 기다려 준 게 크다. 감사할 따름이다. 시나리오를 보다가 이렇게 꽂히는 게 많지 않다. 원래 작품을 하면서 그 안에서 재미를 찾는 편이기도 하고. 그런데 '의뢰인'은 워낙 재미있어서 기대가 컸다.
-전작인 '황해'와 '의뢰인'은 극과 극의 캐릭터인데.
▶'황해'가 끝나고 바로 하다보니 변환하는데 꽤 힘들었다. 감독님도 그렇고 의상팀, 분장팀도 쉽지 않았다.
-변호사 역으로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원래 변호사와 검사가 영화를 이끄는 비중이 7대3 정도였다면 개봉 버전은 6.5대 3.5 정도로 바뀌었다. 아쉬움은 없나.
▶어쩔 수 없다. 그게 영화에 맞고 감독님이 생각한 대로니깐.
-법정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꼽고 변호를 하는 등 디테일부터 말의 늬앙스까지 일일이 만들어내는 등 캐릭터가 생생한데.
▶캐릭터의 입체감을 주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각 배우들이 나눠가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전체를 깨지 않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일까를 고민했다. 브로커 역에 성동일 선배를 추천했다. 둘의 화학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국가대표'를 연상할 수도 있고. 대사도 넣었다. 이를테면 장혁이 나를 믿냐고 하자 '웬만하면 다 믿어요'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손영성 감독은 홍상수 감독 조감독 출신인데다 '약탈자들'로 주목받던 감독이지만 상업영화에 데뷔하는 감독인데. 어땠는지.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훌륭한 감독이다. 처음에 감독님에게 '거침없이 해볼게요'라고 했다. 아이디어도 생각나면 그 때 그 때 제안하고.
감독님이 직설적이다. 막 연기 끝내고 오면 '이거 재미없는데요'라고 바로 말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디가 재미없냐고요, 말을 해주세요, 하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동훈 기자 photoguy@
-하정우, 박희순, 장혁, 이른바 하장박 연기가 상당히 빼어났다. 그런데 불꽃 튀는 시너지보단 각기 다른 아티스트들이 협연하는 콜라보레이션을 보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다. 감독님이 파란 불꽃이다,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붉은 불꽃과는 다를 것이란 뜻이다. 그렇게 나온 것은 영화의 목표가 같았기 때문인 것 같다. 보편적인 재미를 찾는 작품을 만들자고 했기 때문에 같은 방향을 보고 연기했다. 그래서 부딪히지 않은 것 같다. 또 법정 장면이라는 게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기 연기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연극 같고, 그래서 준비를 각자 더욱 충실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박희순과 대결, 장혁과 부딪힘 등이 아티스트들의 경연 같았는데.
▶리허설을 할 때도 새롭게 하기 보단 연극의 합을 맞추듯이 했다. 박희순 선배는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산을 해서 한다. 리허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합을 맞출 수 있는 게 즐거웠다.
-용의자인 장혁이 변호사에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대해 처음과 끝에 한 번씩 이야기한다. 일종의 가이드인데. 그런데 변호사 캐릭터 히스토리가 구축되지 않다보니 끝에 눈빛 장면이자 반전을 연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장면이 108신이다. 신도 기억한다. 108번뇌가 들어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고민도 있고 걱정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나온 장면이 베스트라는 것이다.
-'황해'를 찍고, '의뢰인'을 찍고, 윤종빈 감독과 '범죄와의 전쟁'을 찍고, 전계수 감독과 '러브픽션'을 찍고 있는 중인데. 안 지치나.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깐. '황해'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쭉 가게 됐다. 올해는 특별한 것 같다. 피곤은 심리적인 것 같다.
-욕심이 많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욕심이 많다기 보단 있는 것 같다. 내 젊음을 배우가 필름에 담고 정진해 나가는 것 만큼 의미있는 게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달린 것도 아니고. 아버지께 여쭤 봐도 아버지도 20년 넘게 쉼 없이 하셨으니깐. 답은 없는 것 같다.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게 되면 트로피를 들고 국토 대장정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상을 또 탔고 정말로 국토대장정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주변 친구들과 같이 하려 한다. '러브픽션' 끝나면 한 2주 정도. 무명배우들도 있고 함께 하겠다는 친구들도 있어서 같이 하려 한다.
-하정우는 일을 할 때 한 가지만 염두에 두고 하지는 않는 편인데.
▶친구들과 함께 걷다보면 내가 느낄 수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규모가 커져서 그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젊음의 추억이 될 수도 있고. 또 그게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면 그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것을 지키는 것을 보면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고.
-의류브랜드 H&M에서 하정우가 그린 그림이 담긴 옷들이 출시된다. 콜라보레이션인데.
▶해외에도 나온다는데 의미 있는 작업인 것 같다.
-K 감독이 준비하는 미국 작품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 지금은 고민과 생각을 뒤로 미루고 있다.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생각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