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범 기자
개봉을 앞둔 '투혼'은 모양새는 스포츠 영화다. 얼핏 보면 코미디다. 그러나 그 방점은 말썽꾸러기 야구선수 아버지의 뒤늦은 성장담에 가 찍힌다. 김주혁은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트의 투수 윤도훈으로 등장한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자존심만 남은 사고뭉치. 덕분에 드센 아내에게 쫓겨나 동생에게 얹혀사는 신세다.
지적인 미남배우의 풍모는 간데없는 김주혁이 보내는 굴욕의 시간은 영락없는 허허실실 코미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생만 한 아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 윤도현의 삶에, 김주혁의 표정에, 영화의 공기에 변화가 인다. 이 남자의 눈물겨운 '투혼'은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징하게 울리고. 그 점이 좋아서 선택한 거예요. 그런데 처음엔 시나리오를 보고 '그런데, 뭐? 김상진 감독?' 그랬어요."
그도 그럴것이 김상진 감독이라 하면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귀신이 산다'를 연출한 대표 코미디 감독이다. 그 감독이 작심하고 만드는 진한 드라마. 김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기꺼이 집어들었다. "너무 달라 과연 잘 하실까 싶었지만 승부수를 띄우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 좋아. 했지요."
김주혁에게도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왼손잡이로서 오른손잡이 투수를 연기해야 했고, 두 아이를 둔 아빠 역할을 처음으로 했고, 비주얼을 포기하고 치렁치렁한 갈색 파마머리를 휘날려야 했다.
"보통 모니터를 보잖아요. '투혼' 찍을 땐 의도적으로 안 봤어요. 거기에 매일까봐. 얼굴 좀 이상하게 나왔다고 경직되지 말고, 내 표정 감정 가는대로 가 보자 했지요. 물론 영화를 처음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부분이 많았죠. '어이쿠야'(웃음)
사실 머리 스타일 마음에 안 들어요. 하지만 일부러 신경 안 썼어요. 영화에 몰입이 되면 그런거 안 보이잖아요. 중요하지 않죠. 화면을 보면 '배우가 몰입을 했구나', '얘가 딴 생각 하고 있구나'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일단 몰입하면 얼굴 조금 이상하게 나와도 그거 생각 안하잖아요. 비주얼 신경 안 썼어요."
ⓒ이기범 기자
화가 나면 일단 깽판부터 치고 나서 사후에 수습하는 다혈질 야구선수 윤도현은 사실 김주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바로 말 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김주혁으로선 휘휘 손을 저을 일이다.
"저는 화나도, 혼자 살 삭혀요. 화풀이도 안 하고, 누구 앉혀놓고 이야기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고민 있다고 이야기하는 스타일도 아니에요. 알아서 다 해요. 즐거운 일도 티 많이 안 내고. 심심하죠. 아니 우울하죠. 40대 남자의 싱글 라이프요? 없어요 없어. 집-헬스장-집-헬스장 끝이에요. 이럴 수가 있겠나 싶을 정도로. 예전에는 어울려 놀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젠 노는 것도 재미없고 아예 노는 방법을 까먹었어요."
본인이 생각해도 답답하단다. 그런 김주혁도 억울한 건 있다.
"그런데 저, 촬영장에서는 사회생활 잘하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고 억지스러운 거 싫어하고 그래서 그렇지. 그런데 뭐에 뭐에 필요한 사람들 만나고 이렇게 되면 잘 안되는 거예요. 자존심이 너무 세달까,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여우짓을 잘 못해요. 포장을 잘 못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뻘쭘'해 하니까 '쟤는 차가워 보여'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죠. 그런데 저 그런 놈 아니거든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말은 수줍었으되 거침이 없었다. 김주혁을 두고 사람들은 쉽게 '소심하다'는 표현을 쓰지만 할 말을 하는 그에게는 "틀린 말"이다. 다만 호기를 부리다 뒤늦게 후회하는 윤도훈처럼 그도 돌이켜보면 '그땐 왜 그랬을까' 하는 일들은 있다.
"이제 생각하면 그때 내가 좋 싫었어도 해야했는데 하는 일이 많죠. 그 순간 힘들다고 투덜거리기도 그랬어요. 매니저 형들에게 '뭐가 이리 많아' 그랬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다 저를 위한 일이었거든요. 철딱서니가 없었어요."
ⓒ이기범 기자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 김주혁은 40이라는 숫자가 도리어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했다. 이번 영화로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두 아이를 거느린 아빠로도 등장한 터다. 나이를,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리라.
"마흔을 맞아, 다짐하는 바가 아주 크죠. 내가 조금 바뀐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철이 드는 것도 같고. 남자는 마흔 돼서야 철이 드나봐요.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이제야 이해가 되니까요. 안 좋은 게 아니라 좋은 느낌이에요. 이상하게 연기자로서도 더 열정이 생기고 시나리오에도 더 공감이 가니까요. 눈물도 는 것 같고. 나쁘지 않아요."
김주혁이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심심하기 그지 없는 40살 싱글 라이프를 극복하는 것이다. 김주혁은 "일상생활만 재밌어지면 된다. 그것도 재밌게 하는 게 내 목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일할 때 행복해요. 누구보다 행복하죠. 그렇다고 이렇게 처박혀서 사는 일상을 감수해야 되나. 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차피 한 번 살다 죽는건데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순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