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가 재조명한 셋… 사건, 만든이 그리고 정의

전형화 기자  |  2011.09.29 09:29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가 세상을 바꿀 듯 들끓고 있다. 지난 22일 개봉한 이래 5일만에 100만명을 넘어섰으며, 이번 주말 200만 돌파를 무난히 이룰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흥행 뿐 아니라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 사회변화를 이룰 것처럼 달아오르고 있다. '도가니' 개봉과 동시에 실제 사건을 재수사해달라는 청원이 쏟아지고 결국 일주일만에 경찰청이 재수사에 착수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자칫 냄비처럼 들끓다가 어느새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영화 '도가니'가 조명한 것들을 짚어봤다.

#사건의 재조명


'도가니'는 2005년 광주 인화학교에서 교장과 교직원,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성폭력과 폭행을 가했던 실화를 다룬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2009년 출간된 소설 '도가니'는 80만부가 팔렸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80만명 외에 4900만명이 넘는 한국 사회는 이 사건을 모르거나 잊어버렸다.

영화 '도가니'는 잊혀진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경찰청은 청장 직속 지능범죄수사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광주경찰청 성폭력 사건 전문수사관 10명과 함께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당시 사건의 대한 재수사를 영화 개봉 일주일만에 전격 단행한 것.

뿐만 아니라 교육과학기술부는 기숙사가 설치된 전국 41개 특수학교에 다니는 장애학생의 생활 실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정치권에서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2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재추진하고 아동성범죄 공소시효 폐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은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 이른바 도가니 방지법을 국회에 내기로 했다.

#황동혁 감독·공유 등 만든 이의 재조명

'도가니'는 영화를 넘어 사회현상이 됐지만 이런 현상이 인 데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공이 컸다. '도가니'는 기획부터 제작까지 쉽지 않았다. 시작은 군대에서 원작을 읽은 공유에게서 비롯됐다.

공유는 꼭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출연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소속사에서 그의 뜻을 받아들여 1억원을 들여 영화 판권을 샀다. 무모한 결정이라고 말들이 많았다.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가 흥행이 되겠냐는 것이었다.

제작사 삼거리픽쳐스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공유 소속사 판타지오와 공동제작을 하긴 했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도 결과에 책임지는 것도 제작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투자도 어려웠다. 누가 이런 영화에 돈을 되겠냐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CJ E&M이 참여했지만 내부적으로 반발이 심했다.

황동혁 감독도 연출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어두운 이야기에 원작과 실화를 어떻게 해야 망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 앞섰다. 황 감독은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고, 그런 각오로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개봉을 앞두고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CJ E&M이 '의뢰인' '카운트 다운' 등 29일 개봉하는 영화들에 한 주 앞서 22일 개봉하겠다고 결정하자 "도망갔다"는 지적도 나왔다. 흥행이 안될 영화, 미리 치고 빠지는 수법이란 비아냥도 나왔다.

결과는 달랐다.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트위터 등 SNS를 통해 "꼭 봐야 할 영화"라는 물결이 퍼져나갔다.

이런 데는 영화가 몰입시키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완성도가 떨어졌다면 의미만 남았기 십상이었다. 비록 아이들의 성폭행 장면을 그렇게 리얼하게 만들어야 했나, 사건만 너무 나열시킨 게 아니냐는 지적도 뒤따르지만 '도가니'는 영화 내내 끊임없이 관객을 불편한 현실과 마주보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남자 공유의 변신과 공포영화를 방불시키는 속도감 있게 만든 황동혁 감독의 공이 크다. 1인2역으로 악역을 훌륭하게 연기한 장광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이 영화에 책임이 한층 컸다는 후문이다.

#정의의 재조명

'도가니'는 잊고 지냈던, 모른 척 하고 지냈던 사건을 환기시켰다.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은 인화학교 사건에 국한 된 게 아니다. 영화에서 주요하게 그린 것은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사건이 어떻게 잊혀졌냐이다. 경찰과 검찰, 법원, 교육부, 교회까지 시민을 위해야 할 기관들이 어떻게 시민을 버리는 가를 목격시켰다.

분노의 도가니는 그래서 뜨겁게 달궈졌다.

하지만 이렇게 달궈진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난해 경찰과 검찰, 조폭의 연결고리를 그린 '부당거래'는 불편한 현실에 쓴 웃음 짓게 했을 뿐 변화를 이끌진 못했다.

현재 정치권에서 말들은 높지만 결과로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은 2007년 추진됐으나 당시 사회복지재단들의 저항과 한나라당의 반대로 입법이 좌절됐다. 아동성범죄 공소시효 폐지는 몇 년째 공론에 그치고 있다.

인화학교 사건 역시 재수사에 돌입했지만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이미 판결이 난 사건을 또 다시 단죄할 순 없다. 뜨겁게 달궈졌지만 그만큼 빨리 식기 쉽다.

황동혁 감독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꾸려고 만들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다르다"며 "원작에 있는 세상을 바꾸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려는 세상과 싸운다는 말이 너무 좋아 마지막에 영화에 넣었다"고 했다.

공유도 "사람들이 마음에 울타리가 생긴다면 그런 마음들이 모아져서 다른 사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순 없다. 그래도 알릴 순 있다. '도가니'는 분노와 정의가 뒤섞인 감정을 도가니처럼 들끓게 했다. 냄비처럼 너무 빨리 달아올랐지만 부디 천천히 식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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