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이라고 해도 좋아요. SBS '천일의 약속' 김래원(박지형 역)의 어머니 김해숙(강수정 역)은 완벽한 어머니상을 보여주고 계세요. 일방적으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애처로운 어머니도 아니고, 자식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려는 비이성적인 어머니도 아니세요. 그렇다고 정유미(노향기 역)의 어머니 이미숙씨(오현아 역)처럼 자기주장만 내세워 자식을 곤란하게 하지도 않고 남편을 들들 볶지도 않지요.
사실 초반부터 김해숙씨는 남다른 인성을 보여주셨어요. 일희일비하는 이미숙씨를 늘 웃음으로 대처하며 부드럽게 감쌌고, 온화한 인품으로 남편과 아들을 돌봤죠. 그래서 사실 처음엔 김해숙씨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대신 할 말 다 하고 화끈한 이미숙씨가 더 크게 다가왔죠.
김해숙씨가 처음 시선을 끈 건 지난 7회분이었어요. 파혼을 선언한 김래원씨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김해숙씨는 결국 김래원씨와 몰래 만나고 있었던 수애씨(이서연 역)를 찾아갔어요. 조마조마했어요. 여느 재벌가 사모님처럼 물을 붓고 따귀를 때리실까 봐요.
사실 그렇게 해도 비난하긴 힘든 상황이었는데, 김해숙씬 여느 때처럼 차분하고 조근한 음성으로 그간의 정황에 대해 물으시더군요. 이 대사가 참 인상에 깊었어요. "작가라고 하니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남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비일상적인 대화체를 쓰는 김수현 작가의 영향이 큰 대목이겠지만, 왠지 이 대목에서 김해숙씨가 보여주는 캐릭터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어요.
끝까지 파혼을 고집하는 아들에게 화를 내고 역정을 내기도 했지만, 김해숙씨는 시종일관 아들을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남편 임채무씨가 결국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김래원씨에게 역정을 내며 투자금, 오피스텔, 차까지 두고 집을 나가라고 호령할 때 김해숙씨는 이렇게 말했어요.
"노 이사장이 하느님이라도 돼? 생각이 다른 자식 때문에 일어날 일인데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것 때문에 애를 거지꼴로 내쫓아야 돼? 등 돌리자 그럼 돌리면 돼. 우리 그 집 노예 아니야. 그 집 무서워 자식 내치는 당신이 참 재미가 없다."
그리곤 김래원씨에게 자신의 차 키를 주며 "사무실 투자금 내가 줄게. 시간을 벌자"라며 응원하셨죠. 아들의 파혼으로 자신의 체면도, 사회적 지위도 모두 깎여버렸는데도 그런 것엔 전혀 연연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오랜 친구까지 잃게 됐는데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셨어요.
그 모습이 참 따뜻하더라고요. 일방적인 희생이나 강요가 아니라 부모로서 베풀 수 있는 무조건적인 이해와 관용. 그리고 사랑 말이에요.
그런데 수애씨가 알츠하이머라는 걸 알고도 둘의 사랑을 응원하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