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기자
엄태웅에게 '1박2일'은 터닝 포인트다. 연기 잘하는 배우에서 단숨에 인지도까지 갖춘 배우가 됐다. '엄포스'에서 '엄순딩'으로 변모는 엄태웅에겐 모험이었고, 모험은 성공했다. 영화를 1년에 한 편 제대로 볼까말까하는 시골 아주머니들도 엄태웅을 알아본다.
‘1박2일’은 배우 엄태웅에게도 성장에 도움이 됐다. 엄태웅은 좋은 배우지만 스스로 빛을 발하기보단 주변을 빛내는 역할을 하곤 했다. 순수하거나 냉철하거나, 두가지 역할 사이에서 서성였다. 그랬던 엄태웅이 24일 개봉하는 ‘특수본’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특수본’은 경찰이 살해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특수수사본부가 설치되면서 사건의 배경에 도사린 음모에 맞서는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엄태웅은 ‘특수본’에서 이죽거리기 잘하는 열혈형사로 출연했다. 설경구의 외피를 뒤집어 쓴 엄태웅이다. 엄태웅이기에 열혈형사는 순수하고 더 강렬하다. 그는 비로소 주인공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1박2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엄태웅의 변신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전날 밤 절친한 동료 이선균 모친상에서 밤샘을 하고 달려온 엄태웅은 인터뷰 직전 카페에서 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해장을 했다. 스파게티 그릇에 담긴 라면. 왠지 엄태웅과 닮았다.
-언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나.
▶드라마 '닥터챔프'를 할 때였다. 지금 맡은 열혈형사와 주원이 맡은 FBI 출신 형사 중 고르라고 하더라. '닥터챔프'에서 미국에서 온 남자를 연기했던 터라 열혈형사가 좋겠다 싶었다. 계속 말랑말랑한 걸 했으니 강한 걸 하고 싶단 생각도 했다.
-착한 투덜이는 했어도, 이번 영화처럼 까칠한 투덜이는 처음인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했던 작품들 중 가장 강한 역할인 것 같다. 초반에는 좀 어색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적응되더라.
-슬로우스타터 같다. 연기든 예능이든 발동이 늦게 걸리는 것 같은데.
▶좀 그런 편이다. 연기는 감정으로 하는 편이라 분석 같은 걸 잘 못하는 편이다. '핸드폰'을 찍을 때 박용우 형이 시나리오에 까맣게 분석하는 걸 보고 많이 배웠다. 난 시나리오가 하얗다. 그래도 안되는 건 안되더라.
-내러티브에 허점은 있지만 전체적인 리듬도 좋고 무엇보다 배우들이 살린 부분이 눈에 띄던데. 그 중심에 있었고.
▶내가 중심을 잡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협력했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땐 황병국 감독님이 아니셨다. 시나리오도 많이 바뀌고. 그러다보니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또 고민했다. 매일 밤마다 감독님 방에 시험 공부하러 모인 학생들처럼 시나리오를 들고 모여서 회의를 했다.
-'1박2일'에 출연하고 있기에 캐릭터 변화가 더 놀랐고 반가운데. 이 정도였나 싶다는 반응도 나오고.
▶누구는 트위터에 엄태웅이 연기 못하는 배우인데 이번엔 노력과 기술로 잘 했다고 올렸더라.(웃음) '1박2일'에 들어갈 때 주위에서 우려했던 게 배우로서 모습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다 똑같은 길을 가는 건 아니고 이 길을 가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하기로 했다. 운좋게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하다. 난 복이 많은 것 같다.
-트위터 자주 하나.
▶그냥 반응들이 궁금하잖나. '1박2일' 처음 할 때는 안 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나도 걱정이 크니깐 봤는데 '어흑' 싶더라. 각오는 했지만 병풍으로 왜 저런 걸 데려왔냐고 하더라.(웃음)
-강호동이 빠진 뒤 '1박2일'에서 역할도 늘고 말도 늘었다. 맏형으로 책임을 느끼는 것 같은데.
▶책임은 나뿐만 아니라 원래 멤버들이 더 크게 갖는다. 어차피 벌어진 상황이니 더 열심히 하자고 했다. 제작진도 호동이 형이 빠진 첫 녹화 때 파이팅을 다짐했고. 또 그 시점이 멤버들과 한창 친해질 때였다. 그저 집에 가서 '왜 오늘 녹화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나'란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강호동과 연락은 하나.
▶다들 호동이형과 연락이 안 닿는다. 가장 힘들 사람이고, 아직은 형도 스스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테니깐.
-'특수본'은 엄태웅 뿐 아니라 성동일도 기존 코믹한 이미지를 없애고 담담하고 무게 있게 연기하는데.
▶난 감정이 앞서서 힘들 때가 있는데 성동일 선배는 워낙 연극부터 단련된 분이라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조언해주신다. 정말 많은 걸 배웠다.
-'1박2일' 이후 영화계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특수본' 이후 '네버엔딩 스토리'를 찍었고 곧장 '건축학개론'에 들어갔는데. 다작 아닌가.
▶다작이죠, 뭘. 다행히 겹치지 않아 감사하다. 그대로 제의 받은 영화들이 너무 좋았다. 좀 쉬어야지 하면 언제 그런 작품을 할 수 있겠나.
이동훈 기자
-'1박2일'은 배우로서 엄태웅에게 터닝포인트 같다. 그동안 사실 주연을 해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설경구 송강호 김윤석도 아니고. 그 밑에 박해일 류승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병헌 장동건 같은 한류스타도 아니고. 비슷한 위치의 이선균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자리잡았는데 엄태웅은 애매했다. 그런데 이제 확실하게 극의 중심에 선 것 같다. 다음 작품들은 더욱 두드러지는 영화고 역할들이고.
▶애매하다는 생각 나도 했다. 후련하지 않고 아쉬움도 있고. 그런데 일은 들어오고. 그게 나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쉬운데 또 보고 싶은.(웃음) 운이고 때가 있는 것 같다. 쌓여가면서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 '1박2일'은 그런 때 만난 터닝 포인트가 맞는 것 같고.
어제 빈소에서 송강호 선배를 만났다. 내가 이런 저런 연기를 할 땐 송강호 선배랑 설경구 선배가 떠올라서 힘들다고 했다. 그랬더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너 나이에 맞게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시더라.
'실미도' 때 설경구 선배를 보고 왜 난 저렇게 폭발적이게 연기를 못하냐고 고심했다. 지금은 그 때 설경구 선배 나이를 지나가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연기를 조금씩 쌓아가서 최대치를 보여주는, 그런 시간들을 찾아가고 있다.
-'특수본'에서 상대역으로 주원이 출연한다. 첫 영화에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표현한 건 상대역인 엄태웅이 리액션과 배려를 잘 해줬기 때문인 것 같은데.
▶뭔가가 양보가 있어야 하고, 중간점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사실 엔딩을 두 번 찍었다. 처음엔 다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찍었는데 정진영 선배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힘든 상황을 묵묵히 하시더라. 그게 맞는 것 같다.
-수애가 이상형이라고 검색어에 뜨기도 하던데.
▶'님은 먼 곳에'를 같이 하고 편하게 연락하는 사이다. 그런데 '1박2일'에서 문자 주고 받는 걸 이수근이 보고 호동이형이 띄우면서 괜히 그런 분위기가 됐다. 에라 모르겠다, 원래 좋아했다고 했더니 기사가 막 나더라. 처음에는 수애가 '내가 그렇게 좋았냐'고 놀리는 문자가 오더니 나중엔 '누구 혼삿길 망치려고 하냐'는 문자도 오더라.(웃음)
-이제 관객들이 궁금해 하는 배우가 된 것 같은데.
▶예능을 하면서 생긴 호감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안 가는 길을 가면서 생긴 성취감이랄까.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다. 예전부터 그렇게 느끼고 살지만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