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이범수 대리, 당신은 "당장 해고야!"

[김관명칼럼]

김관명 기자  |  2012.01.30 10:53


배우 이범수가 아주 제대로 물을 만났다. SBS 월화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우여곡절 끝에 천하그룹에 입사한 유방 역. 느릿느릿한 충청도 사투리와 눈에 쏙쏙 들어오는 실감 연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알고 보니 시골 중학교 후배였던 직장 선배(윤용현)와의 티격태격 신은 과거 '정글쥬스' 이범수의 환생이라 할 정도로 코믹연기의 성찬이다.


이범수가 사로잡은 건 시청자만이 아닌 것 같다. 입사 한 달도 안 돼 초고속 승진, 대리를 달았으니까. 생각해보면 입사 면접 때 3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읊은 주인공이 바로 유방 아니었나. 또한 럭비공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안하무인에 가진 건 '빽'밖에 없는 백여치(정려원) 마음까지 사로잡았으니 더 설명이 필요 없다. 과연 이런 유방이 수많은 경쟁자, 특히 항우(정겨운)를 물리치고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지가 이 드라마 관전법이다. 하긴 그러니까 '초한지'지만.

그러나 만약 이런 유방 대리가 실제로 직장 후배거나 선배였다면? 불의를 못 참고(짝사랑하는 연구원의 왕따 현장 목격신), 회사내 라인정치를 무시하며(부실계열사 정리를 위한 전사본 팀 선택신), 목표가 생기면 밤을 지새우더라도 해치우고 마는 장점 많은 유방이 지근거리의 동료였다면?


결론부터 말하면 '아찔하다'. 이런 샐러리맨이 승승장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불공평하고 어설프며 제대로 된 평가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꿩 잡는 게 매라는 오로지 실적 위주의 싸늘한 기업시스템에 대한 방증이다. 개인비리는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싸구려 온정주의와 동료애의 글러먹은 표현법이다.

우선 유방은 입사비리자다. 시청자들은 다 아시겠지만 유방의 3개 외국어 실력은 '사기'였다. 면접 자리에서 항우가 비밀이어폰으로 불러준 대로 그냥 따라했을 뿐이다. 필기시험 역시 미리 빼낸 시험지를 달달 외운 덕분. 세상에 이런 중범죄가 없다. 드라마에서야 그냥 넘어갔지만 이런 입사 비리에서부터 횡령, 사기, 성희롱, 협잡, 비열, 업적 가로채기 등 모든 회사 내 가증스러운 죄악은 시작되는 거다.


유방은 또한 회사 친인척의 뇌물수수 혐의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정려원은 천하그룹 회장 이덕화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그의 말괄량이 외손녀. 아무리 이범수가 회사에서 쫓겨날 뻔했던 백여치 정려원을 구해줬어도, 수백만원 하는 양복 등 백화점 선물을 무더기로 받을 수는 없다. 그것도 근무시간에 백화점에 가서 동반 쇼핑을 하면서까지.

드라마 재미를 위해서 삽입된 것이지만, 유방이 선배이자 사수인 번쾌(윤용현)를 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 고질병 중 하나인 지연-학연을 실감케 한 꼴이다. 자신을 까탈스럽게 대한 사수가 알고 보니 고향의 3년 학교 후배였으니 유방의 태도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사수를 화장실에서 멍이 들도록 패대는 직장인은 당장 해고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른 상사를 대하는 그런 몹쓸 인간. 고향 후배는 회사 관두고 마음대로 패든지 사랑하든지 하시라.

마지막으로 유방은 항우에 비해 무능력하다. 회사의 흥망을 결정할 만한 기획력 또한 눈 씻고 봐도 없다. 천하그룹 부채가 정확히 얼마인 줄 알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은 가졌지만, 정작 부실 계열사를 되살릴 방법에 대해서는 본인 대사 그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다. 부사장 자리를 놓고 전사본 내 팀 대항 형식으로 펼쳐지는 최근 '싸움'도 항우가 주도했다. 인천 지역 부실계열사에 팀내 역량을 집중키로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연구원 홍수현이 점찍어준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런 이범수, 유방 대리가 매주 보고 싶어지는 걸까. 못하는 건 못한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하는 솔직함. 라인과 눈치, 아부 대신 인지상정과 상식을 택하는 건강한 염치. 힘든 동료를 최소한 짓밟지 않고 오히려 다독거려 줄 줄 아는 배려. 여기에 (약의 부작용으로 희화화됐지만) 회장이 대머리라고 말할 정도로 'NO라고 말할 줄 아는' 올곧은 판단까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이 덕목들이 지금 너무 그립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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