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균 기자 tjdrb23@
배우 배두나(33)가 '괴물' 이후 6년만에 한국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코리아'(감독 문현성)의 그녀는 조용하지만 강렬하다. 역시, 그녀를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탁구 세계 선수권대회를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처음으로 남북한이 '코리아'라는 단일팀으로 스포츠대회에 참가했고, 여자팀은 기적같은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그 당시를 지켜봤던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역사적 팩트 만으로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5월 3일 개봉을 앞둔 영화 '코리아'는 그 뜨거운 기억을 스크린에 되살린다. 여자팀의 맏언니인 북한 선수 리분히 역을 맡은 배두나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어버렸다.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꽉 잠길 정도다.
"안 울겠다고, 참자 참자 하는데 계속 우는 거예요. 촬영 할 때는 내내 '안 울어야돼', '참아 참아' 이렇게 누르려고 노력을 했어요. 터질 것 같더라고요. 그게 결승전에서 '탁' 하고. 이성을 놨던 것 같아요. 자료 화면을 봤어요. 실제 경기에서도 다 끌어안고 우셨더라고요. 그걸 위해서 내내 꾹꾹 참았죠. 너무 힘든 촬영이라 '꼭 이겨야 한다'는 마음도 절정에 달했던 것 같아요."
배두나는 리분희가 되기 위해 등까지 내려오도록 기른 머리를 싹둑 자르고 메이크업도 싹 지웠다. 탁구는 물론이고 평양 사투리도 따로 교습을 받았다. 결코 따라할 수 없었던 게 하나 있었다. 자그마한 리분희 선수의 체구와는 비교도 안되게 껑충한 키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얼굴을 뜯어봐도 땡그란 눈의 배두나는 오밀조밀한 리분희와 닮지도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꼭 배두나가 리분희 같다. 말수는 없어도 든든했던,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련한 맏언니.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연습량이 많지 않았대요. 왜 그러냐 했더니 간염에 걸려서 체력이 좋지가 않다고. 그런데 그 상태로 단식 은메달을 땄대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그런 일화를 들으면 제가 연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가 보이는 거예요. 얼굴은 뽀얗고 아기같은데 단체 금메달, 단식 은메달을 딴 사람. 그럼 어떤 사람인지 아시겠죠? 최대한 절제하고 경기에만 집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꼬박 석달간 탁구 연습을 했다. 지바 대회 장면은 경북 안동의 체육관을 빌려 꼬박 한 달을 촬영했다. 여름 땡볕 아래 놓인 실내 체육관에 조명이 더해지면 실내 체감 온도는 50도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뜨겁게 찍었다'고 하는데 정말 문자 그대로 뜨겁게 찍었어요. 안동은 지옥훈련이라고 해도 무방하죠. 해변에서 타이어 끌고 달리는 것만 지옥훈련이 아니라. 일단 들어가면 숨이 팍 막혀요. 지옥문을 들어가는 심정으로 들어가면 땀 냄새가 나다가도 후각이 금방 마비돼요. 진짜 살도 많이 빠졌고요. 땀이 그렇게 많이 나 본 적이 없었어요. 평소에 땀이 없는 편인데 찍고 나면 속옷이 싹 젖을 정도였으니까. 땀띠 나본 게 처음이네요."
아무리 어렸을 적 탁구를 쳐봤다지만 쉽지 않았다. 키만 껑충 큰 그녀는 영화 데뷔작인 '플란다즈의 개' 시절 봉준호 감독에게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해서 '낙지소녀', '접힌 여자'로 불렸던 아가씨다. 촬영장이 아니면 횡단보도 초록불이 깜박깜박 해도 여간해선 뛰지 않는단다. 배두나는 "'괴물'도 그렇고, 제가 운동선수 역을 한 게 저도 신기하다"고 배두나는 웃음지었다.
"에이, '괴물' 양궁선수는 전국체전 동메달이요. 여기는 세계 랭킹 3위였다고요. 여러모로 힘들었죠. 폼도 폼이지만 박자를 놓쳤다가 순발력있게 엇박으로 치는 거, 그런 걸 보이고 싶었어요. 그나마 어깨를 던져서 치니까 상체는 쉬웠는데, 하체가 너무 힘든 거예요. 아, 탁구대는 왜 그렇게 낮은 거예요. 구부려야 해서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임성균 기자 tjdrb23@
'코리아'의 배두나는 짧고 강단있는 북한 말씨로 먼저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그녀에게는 처음 하는 북한말이 큰 도전이었다고. 이른바 평양 차도녀. 세련된 북한 말씨를 구사하기 위해 섬세하게 말을 다듬었다. 외가쪽이 개성 출신인 탓일까. 북한말 선생님은 그녀에게 '이미 갖고 있는 북한 말씨가 있다'고, 어미랑 발음만 바꾸면 된다고 힘을 줬다.
" 이게 '공기인형' 다음 작품이에요. '클라우드 아틀라스'(배두나의 할리우드 진출작)에서도 영어 말고 다른 나라 말도 하거든요. 아, 나는 언제 한국말을 하나 했어요.(웃음)
언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제가 맡은 캐릭터는 묵직하고, 한 마디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관객들이 웃으면 안 되는데 했어요. 제가 어떻게 연기했는지도 몰랐는데, 북한말이 멋있게 들렸다고 해 주셔서 의외였어요. 배우면서 깨달았던 건 북한 말씨라고 해서 다른 나라 말처럼 접근하면 따라하기밖에 안 되는 거라고."
ⓒ임성균 기자 tjdrb23@
문득 궁금했다. 드라마에서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 '공부의 신', '글로리아'처럼 상큼 발랄하게 에너지를 불태우다가 스크린에서는 한발짝 물러난 듯 쿨하게 보이는 이유가 뭔지. 그녀의 대답은 "장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거였다.
배두나는 극장에 돈 내고 가서 마음먹고 집중하는 것과 집에서 나오는 대로 TV를 보는 것이, 관객과 시청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다르다고 믿는다. TV에서는 '으쌰으쌰' 시청자들이랑 호흡하는 게 너무 좋아도 스크린에서는 연기를 좀 생략하는 이유다. 그녀는 "드라마에서는 좀 더 친절하게 연기하자는 게 있고, 영화는 좀 불친절하게 하는 편인 것 같다"며 "제 감정을 따라와주면 기쁘지만, 내 감정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게 싫다"고 선을 그었다. 그래서 슬쩍 물어봤다. 강렬하게 열연해서 상 받고 싶지 않냐고. 유독 국내 영화상에서는 상복이 없었던 그녀다.
"저 상 많이 받았는걸요.(배두나는 이미 '공기인형' 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탔다) 상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연연하지도 않고요. 저는 열연을 별로 안 좋아해요. 내 연기 이래요, 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연기하는 게 부담스러워요. 이입을 못해요. 상황에 연연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렇게 해서 상을 받아야 하는 거라면 안 받겠어요.
아직은 연기를 배워가는 단계잖아요. 연극, 드라마, 영화. 다 배우는 게 달라요. 미니시리즈랑 주말드라마도 배우는 게 다른걸요. 그렇게 배워가는 게 좋아요. 시트콤도 깜짝 출연한다면 좋고요. '뿌잉뿌잉' 같은 거 할 수 있겠냐고요? 오그라드는 건 싫지만…. 할 수는 있는데 아마 못 봐줄 거예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