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추노·추격자..쫓고 vs 쫓기는 자들의 품격

[김관명칼럼]

김관명 기자  |  2012.07.03 12:02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추적자\' \'추격자\' \'추노\'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추적자' '추격자' '추노'


원래 '도망'에는 품격이 없는 법이다. 오죽했으면 줄행랑이고 삼십육계일 텐데 여기에 무슨 품격이고 점잔이며 체면인가. 이 볼품없이 쫓기는 상대를 쫓는 자들도 마찬가지. 다급해서 정신없이 쫓아가는 데 무슨 격식이고 나발이며 품격인가.


하지만 이는 현실 얘기다. 드라마는 다르다.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일을 있는 것처럼 보여주거나, 최소한 그럴듯하게라도 침소봉대하는 게 영화와 드라마의 마땅한 도리라면, 이 좇고 쫓기는 '밀당'에서도 현실에는 도저히 없는 '품격'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드라마의 책무이자 쾌감이다.

그리고 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서 '품격'을 찾은 빛나는 성취가 바로 하정우 vs 김윤석의 영화 '추격자'였고, 오지호 vs 장혁의 드라마 '추노'였으며 방송중인 SBS 드라마 '추적자'였다.


생각해보시라. '추격자'에서 보여준 도망자 하정우와 추격자 김윤석의 처절하면서도 절박했던 레이싱을. 만약 하정우가 야밤 골목길을 냅다 도망치는 모습이 추하거나 어설펐더라면, 만약 김윤석이 이 미꾸라지 하정우를 쫓는 모습이 샌님 같거나 아마추어 같았더라면? 그래서 김윤석이 대충 쫓다 하정우를 대충 잡았더라면? '추격자'에 '명품 스릴러'라는 수식어는 못 붙였을 터. 그만큼 현실에서라면 허접했을 게 뻔했던 이 둘의 관계에 함부로 넘보지 못할 '품격'이 있었다는 얘기다.

'추노'도 비슷하다. 노비로 전락한 오지호에게서 한때 세상을 품을 것 같았던 전직 조선 무관의 그 높은 품격이 배어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오지호를 쫓는 추노꾼 장혁에게서 한 여인(이다해)을 끝까지 사랑할 만한 넓은 품격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오지호는 그저 양반 계급의식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일개 도망노비, 장혁은 그저 입 걸고 쌈박질만 잘 하는 일개 시정잡배 추노꾼에 불과했을 터. 그래서 이들의 길고 길었던 추노는 진정 아름다웠다.


'추적자'. 지난 2일로 11회까지 방송한 이 드라마 출연진은 그야말로 '품격' 종합선물세트다. 세상 보는 눈이 맑았고 법만을 믿었던 형사 백홍석(손현주)은 말할 것도 없고, 한때 법과 형사 알기를 껌처럼 알다 요즘에야 제 정신 차린 검사 최정우(류승수), 심지어 이젠 이들로부터 '쫓길' 일만 남은 드라마 2대 악의 축 강동윤(김상중)과 서 회장(박근형)마저 '품격'을 풍기니까.

강동윤이 누구인가. 자신의 야심을 위해 사람 생명 하나쯤은 우습게 여긴 겉만 잘나가는 대선후보 아닌가. 서 회장 역시 가진 건 돈과 권력밖에 없어서 모든 가치를 '자신의 이익'으로 평가하는 속물 중의 속물 아닌가. 그럼에도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선, 인생 밑바닥에서 각각 대선후보와 킹메이커 자리에까지 오른 강고한 세계관과 신념이 설득력 있게 배어 있다.

'추적자'가 앞으로 더 기대되는 건 이 쫓기는 자들이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데다 심지어 '품격'마저 갖췄다는 데 있다. "저 자리에 오르려고 너를 사랑했고 네가 필요했다"고 한 남자(김상중), "적산가옥 입주민들을 불하받은 당일 모조리 내쫓은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한 남자(박근형). 순진한 정의감과 딸을 잃은 분노만으로 이들을 쫓기엔 이미 이들은 너무 크고 강고한 것이다.


맞다. 품격이란 꼭 신사에게만 있는 건 아닌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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