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재심' 스틸컷
가진 거라곤 빚 그리고 자신감뿐인 지방대 출신 변호사 준영(정우 분)은 대형 로펌에 취직하려고 무료 법률상담에 나선다. 살인 혐의로 10년 옥살이를 했다는 현우(강하늘 분)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준영은 '난 안 죽였다'는 한마디에 돈과 유명세를 모두 얻을 '건수'임을 직감하고 재심을 추진한다. '재심'이란 이미 판결이 난 사건을 다시 다루는 재판.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며 조금씩 현우와 가까워지던 준영은 조금씩 달라져 간다.
영화 '재심'(감독 김태윤)은 2000년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살인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2013년과 2015년 시사프로그램에서 다뤄 공분을 산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증거 없는 자백'을 근거로 살인자가 된 소년은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영화는 한 변호사가 사건을 접하고 우여곡절 끝에 재심이 진행되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전작 '또 하나의 가족'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산재 피해자 실화를 다뤘던 김태윤 감독은 '재심'에 대해 "사회고발이 아니라 영화"임을 강조했다. '팩트'만으로 치가 떨리는 사건이지만 그대로 상업 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영화는 돈 되는 일을 찾아다니던 변호사의 성장기로 뼈대를 삼고, 진실을 찾아가는 이들의 몸부림에 극적 상상력을 더했다. 바탕이 된 실화가 워낙 묵직하고 차곡차곡 쌓아올린 메시지도 단단하다. 영화를 이끄는 두 축, 정우와 강하늘의 앙상블이 좋다. 누명 쓴 아들을 둔 억척스런 촌부가 된 김해숙이야 두말할 필요 없다. 특히 촌 동네 양아치였다가 울분을 꾹꾹 눌러 담은 출소자가 된 강하늘에게선 대번에 '동주' 이후의 성장이 감지된다.
'재심'은 여러 모로 송강호 주연의 1000만 영화 '변호인'을 떠오르게 한다. 실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 돈 없고 빽 없는 속물 변호사의 성장, 진실을 찾으려는 몸부림, 약자에게 집중되는 공권력의 폭력성,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대사 한마디까지 닮았다. 그 유사성을 의식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는 영화의 강점이자 약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검증된 흥행 코드를 담아냈다 할 수 있지만 비교를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30여년 전 부림사건이 모티프였던 '변호인'이 고인이 된 고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화 이전의 끔찍함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면, '재심'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부조리와 불합리에 기가 차게 만든다. 부당한 권력을 향해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되잖아요!"라고 외쳤던 변호사는 이제 "우리가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국을 겨냥하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잘못한 게 확실한데도 대체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을 하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친다.
'재심'은 여전히 강력한 실화 영화의 힘을 보여주지만, 실화 영화의 아쉬움도 여전하다. 캐릭터의 변곡을 더 분명히 짚어줬으면, 관객의 입맛을 노려 친 양념이 좀 더 담백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양념이 과했다 싶은 대목 곳곳이 사실은 실제 사건을 그대로 옮겨온 부분이라는 것 또한 감안해야 한다.
오는 15일 개봉. 러닝타임 119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