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남산의 부장들' 느와르풍 스릴러로 무너뜨린 박정희 신화 ①

전형화 기자  |  2020.01.16 11:15


남산이 공포의 대명사였던 시절이 있었다. "남산에서 왔습니다"란 말은 공포스런 소개요, 남산에 끌려갔다는 말은 지옥에 끌려갔다는 말과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남산은 중앙정보부의 다른 말이었다. 김종필을 시작으로 역대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군림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의 마지막을 그렸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 박 대통령을 암살했다. 그로부터 40일 전.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박용각이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박 정권 실체를 폭로한다.

박 대통령은 격노한다. 경호실장 곽상천은 대통령의 총애를 등에 업고 김규평을 질책한다. 김규평은 박 대통령에게 박용각을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고 묻는다. 박 대통령은 유신 개헌을 앞두고 박용각에게 그랬던 것처럼 "뜻대로 해라. 임자 곁에 내가 있잖아"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유신 개헌을 진두진휘했던 박용각은 일이 마무리되자 박 대통령에게 팽 당했던 터였다.


박용각은 미국을 찾은 김규평에게 "너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외에 다른 정보원들을 갖고 있다고 귀뜸 한다. 그 정보원들로 해외에서 돈을 세탁하고 중앙정보부마저 감시한다고. 미국 CIA에선 그들을 '이아고'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김규평과 박용각은 쿠테타 동지이자 친구 사이. 김규평은 박용각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한편 박 대통령에 관해 쓴 책을 발행하지 말고 내놓으라고 권한다. 그러면 자신이 알아서 잘 마무리하겠다며.


그렇게 마무리될 것 같았던 사건들은 계속 눈덩이처럼 커져 간다. 유신 말기, 미국은 더이상 박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하려는 압력에 초조해 한다. 그 곁에는 딸랑딸랑 거리는 곽상천 같은 사람들과 그저 침묵하는 사람들뿐. "평생 각하 곁을 지키겠다"던 김규평은 점점 갈등에 휩싸인다.

'남산의 부장들'은 역대 중앙정보부장 이야기를 다뤘던 동명의 논픽션을 영화화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 마지막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에선 실명을 피해 김재규 대신 김규평으로, 김형욱 대신 박용각으로, 차지철 대신 곽상천으로 바꿨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사건과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까지, 그 40일에 인과가 있을 것이라며 영화적으로 되짚었다. 역사와 루머와 영화적인 허구로 그 40일을 재구성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느와르다. 고전 스파이물을 갱영화처럼 느와르풍으로 차용했다. 박용각의 미 의회 증언부터 실종까지, 얽히고설킨 스파이물의 구성을 따른다. 미국 워싱턴DC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각기 다른 생각들과 다른 음모가 교차한다. 미모의 팜므파탈까지, 고전 스파이물이 주는 양식적 쾌감이 상당하다.


'남산의 부장들'은 스릴러다. 임상수 감독이 10.26을 '그때 그 사람들'로 블랙코미디로 만들었다면, 우민호 감독은 10.26을 스릴러로 만들었다. 검고 어둡고 음울하다. 주군이라 모시던 사람을 죽이기까지 그 40일의 마음과 닮았다.

'남산의 부장들' 전반부는 느와르며, 후반부는 스릴러다. 이 느와르풍 스릴러는 영화 전체에 긴장감을 더한다. 이 느와르풍 스릴러는 편집으로 완성됐다. 편집이야말로 '남산의 부장들' 일등 공신이다. 자칫 산만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반부는 교차편집으로, 후반부는 밭은 리듬으로 조율했다. 편집 덕에 이야기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다만 편집 탓에 주요 가지들이 사라졌다. 이아고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김규평의 고뇌와 결단은 점프한다. 빠른 편집으로 줄기의 속도는 살렸고, 빠른 편집으로 많은 설명이 실종됐다.

그럼에도 '남산의 부장들'이 시선을 잡아채는 건,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때문이다. 김규평 역을 맡은 이병헌은 고전영화 주인공 같다. 음영이 뚜렷하다. 마지막 어디로 가야 할지를 들을 때의 이병헌 얼굴은, '남산의 부장들'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의 이성민은 연기로 탈신화를 구현했다. 박정희란 신화를, 신전에 모셔진 이미지를, 연기로 부숴버렸다. 박정희를 흉내 내지 않고, 그만의 박정희를 만들었다. 링컨 기념관의 링컨 동상처럼 청와대 권좌에 앉아있던 그가, 왜 여대생과 술자리에서 총을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는 지를, 이성민만의 방식으로 그려냈다.

박용각 역의 곽도원과 곽상천 역의 이희준도 좋다. 곽도원의 마지막 표정과 이병헌의 마지막 표정이 겹쳐진다. 로비스트 역의 김소진은 매우 매우 좋다. 고전 스파이물 팜므파탈인데 지극히 한국적이며 지극히 김소진 같다.

10. 26이 지나고, 12. 12로 신군부가 들어섰다. 중앙정보부는 안기부로 바뀌었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라는 걸 '남산의 부장들'은 담담하게 전한다. 그렇게 '남산의 부장들'은 역사로 영화의 비워진 구멍을 채운다.

1월 2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추신. 부마 항쟁이 200억원이 투입된 상업영화에서 전면에 부각된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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