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윤여정이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AFPBBNews=뉴스1
윤여정은 26일(한국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한국 취재진과 별도로 인터뷰를 가졌다. 한예리와 같이 자리에 착석한 윤여정은 "두 분에게 수상 소감에 대해 묻는다"는 질문을 받자 한예리를 가리키며 "얘는 안 탔는데"라고 답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윤여정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팬이다.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기자의 소감에 "뭐가 영광이냐. TV 틀면 나오는데"라고 말해 또 다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한국 특파원들이 손을 들어 질문하자 "내가 대통령도 아니고 손을 들지 말라"는 말도 했다. 질문이 길게 이어지면 "하나씩만 질문해라. 늙어서 잊어버린다"며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중간중간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마시며 경쾌하게 답을 하는 모습도 멋졌다.
윤여정은 향후 계획에 대해 묻자 "어떻게 알겠냐. 점쟁이도 아닌데"라면서 "앞으로 계획은 없다. 오스카를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냥 하던대로 할 거다. 예전부터 마음을 먹은 게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민폐 끼지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 죽으면 좋겠다는 거다"라고 말했다. 스스로는 특별한 연기 철학이 없다고 하지만, 55년이 넘도록 아이들 밥 굶기지 않도록 절실하게 연기를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철학이 자연스레 드러났다.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말에 "최고, 최고의 순간 이런 건 모르겠고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지 않나. 동양 사람에게 아카데미는 높은 벽이 됐다. 근데 내 생각은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말자, 최중만 되면서 살면 되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만 나 사회주자가 되나"라고 말해 다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윤여정은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나선 브래트 피트에게 "우리 영화 찍을 때 어디 있었냐"고 재치있게 물었다. 브래드 피트가 '미나리' 공동제작사 플랜B 설립자인 까닭이다. 그랬더니 온통 미국 사람들이 브래드 피트에 대해서만 묻는다며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다"면서 "다음에 영화 만들 때 돈을 조금만 더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더 쓰겠다고 하더라. 크게 쓰겠다는 말은 안 하더라. 굉장히 잘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앞서 윤여정은 시상식이 끝나고 진행된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브래드 피트에게 한국에 한 번 오라고 했다. 브래드 피트가 꼭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면서도 "하지만 나는 미국 사람들 단어가 화려해서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입 바른 소리 잘하는 미국 사람들에 대한 촌철살인도 빠지지 않은 것이다.
윤여정은 시상식에서 첫 영화 '화녀'를 연출한 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감사와 '미나리' 정이삭 감독에 대한 감사를 한 데 대해 "김기영 감독님은 내가 어려서 만나고 정이삭 감독은 내가 늙어서 만났다. 김기영 감독님께 해주지 못 한 걸 정이삭에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윤여정이 정이삭 감독에 대해 설명한 게 일품이다.
윤여정은 "나보다 어리고 아들보다 어린 친구인데 참 차분하다. 수십 명을 컨트롤하려면 감독이 돈다. 근데 그걸 차분하게 컨트롤한다. 누구도 모욕 주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내가 흉 안 본 감독은 정이삭이 처음"이라며 "그에게서 희망을 봤다. 한국인 종자로 미국 교육을 받아 굉장히 세련된 한국인이 나왔다. 그 세련됨을 보는 게 좋았다. 걔라고 화가 안 났겠나. 내가 존경한다고 했다. 내가 정이삭을 만난 것도 배우를 오래 해서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내가 술 취했다"며 웃어 또 다시 폭소를 안겼다.
윤여정은 "내가 감사를 아는 나이가 됐다"라면서 한예리에게 나 "지금 몇 살이니"라고 물었다. 이에 한예리가 만 나이로 답하려 하자 "한국 사람들이니까 만 나이로 하지마"라고 하면서 "내가 75살인데 그래도 철이 안난다"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외신들과만 인터뷰를 했다는 기자에게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한국말로 인터뷰 하는 걸 좋아하지 영어로 하는 걸 좋아하겠나.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살겠나"라고 답했다. 이어 "7, 8시간 줌으로 인터뷰 했다. 정치가들이 표를 사기 위한 것 처럼 회사가 시켜서 한 홍보 활동"이라면서 "봉준호 감독은 줌으로 하는 게 좋다고 했다. 송강호는 돌면서 인터뷰를 하느라 코피가 났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윤여정은 "우리는 즐거웠는데 수상에 대한 기대가 커지자 '못 받으면 어떻게 하나'라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받을 생각도 없고 후보만으로 영광이었는데 힘들었다. 운동선수의 심정을 알겠더라. 2002년 월드컵 때 발 하나로 온 국민이 난리 칠 때 그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 까, 김연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여정의 이 같은 인터뷰 영상은 유튜브로 소개돼 큰 화제를 사고 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의 진솔하고 유쾌한 말에 젊은 세대들이 열광하고 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지 않는, 구태여 가르치려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 그녀. 윤여정은 이날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후보가 한명씩만 데리고 올 수 있어서 한예리와 왔다며 "이번에는 견학이지만 다음에는 (후보로) 오렴"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앞선 어른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준 것이다.
윤여정의 말들에 열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