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 황준서가 31일 KT 위즈와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
황준서(19·한화 이글스)가 데뷔전부터 충격적인 임팩트를 남겼다. 데뷔 전부터 '리틀 김광현'이라는 수식어가 달렸지만 투구 내용을 보면 영락없는 류현진의 신인 때 모습이었다.
황준서는 31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 2024 신한 SOL뱅크 KBO리그 홈경기에 선발 등판해 5이닝 동안 73구를 던지며 3피안타(1피홈런) 2사사구 5탈삼진 1실점 호투를 펼쳤다. 팀이 14-3 대승을 거두며 황준서는 데뷔전에서 선발승을 챙겼다.
놀라운 기록이다. 한화 소속으로 프로 데뷔전에서 승리를 따낸 건 2006년 류현진 이후 무려 18년만이다. 40년이 넘는 KBO리그 역사를 되돌아봐도 황준서 앞에 단 9명뿐이었다.
한화 황준서가 31일 KT전에 선발 등판해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한화 이글스
될 성 부른 떡잎이긴 했다.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한화는 망설임 없이 장충고 좌투수 황준서를 지명했다. 마른 체형에도 불구하고 시속 150㎞ 공을 뿌리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였고 스플리터의 완성도는 수준급이었다. 당장 한화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류현진의 갑작스런 합류로 선발 경쟁이 더 치열해졌고 마지막 한 자리를 선배 김민우에게 먼저 내줬다. 2군에서 선발 수업을 이어가던 황준서는 단 1경기를 던진 뒤 때 이른 콜업을 받았다. 김민우의 담 증세로 인한 임시 대체 선발.
한시적 임무였지만 황준서는 최원호 감독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완벽한 투구를 펼쳤다.
1회초 마운드에 오른 황준서는 리그를 통틀어 가장 화끈한 KT의 상위 타선을 삼자범퇴로 돌려세웠다. 배정대는 황준서의 스플리터에 꼼짝없이 선 채로 삼진을 당했다. 수위 타자 천성호도 2루수 땅볼로 돌려세운 황준서는 멜 로하스 주니어에게도 스플리터로 탈삼진을 기록, 단 13구 만에 데뷔전 첫 이닝을 끝냈다.
한화 황준서가 31일 KT전에 선발 등판해 역투하고 있다. /사진=한화 이글스
2회말 타선이 무려 7득점하며 승리 투수 희망이 더욱 커졌다. 타자 일순하며 다소 어깨가 식을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탓일까. 3회 첫 타자 김상수를 상대로 속구가 제구가 되지 않아 몸에 맞는 공을 허용했지만 이번에도 실점은 없었다. 2번째 만난 황준서에게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강백호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4회 문상철에게 좌월 대형 홈런을 맞았지만 이날 경기의 유일한 오점일 뿐이었다. 황재균에게 중전 안타를 내주며 흔들리는 듯 했지만 조용호와 장성우에게 연속 2루수 땅볼로 잡아냈고 야수들의 도움 속에 4회도 마쳤다.
당초 최원호 감독은 이날 황준서의 투구수를 75구 내외로 제한하면서도 '5이닝 3실점' 정도를 기대했는데 4회까지 황준서의 투구수는 66구였다. 팀이 11-1로 크게 앞선 상황이었기에 데뷔전 승리를 위해 5회에도 황준서를 올리는 것으로 보였다.
한화 황준서가 31일 KT전에 선발 등판해 위기를 넘기고 더그아웃에서 선배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이날 던진 73구 중 67%에 달하는 49구가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신인이라고 믿기지 않는 공격적 피칭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공에 자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속구 최고 시속은 149㎞에 달했다. 평균 구속은 145㎞의 속구를 33구, 스플리터(평균 130㎞)를 34구 뿌렸다. 커브는 단 6구(평균 114㎞). 사실상 투피치였으나 KT 타자들을 완벽히 요리했다.
류현진이 오버랩됐다. 류현진은 2006년 4월 12일 LG 트윈스전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7⅓이닝 동안 3피안타 1볼넷 10탈삼진으로 승리 투수가 됐다. 이 시즌 류현진은 30경기에서 201⅔이닝을 소화하며 18승 6패 1세이브 204탈삼진 평균자책점 2.23을 기록했다.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류현진은 현재까지도 KBO 유일무이한 신인상-최우수선수(MVP) 동시석권 선수로 남아 있다.
경기 후 최원호 감독은 "황준서가 약속했던 75구 내에 5이닝 1실점으로 상대타선을 막으며 고졸 신인 데뷔전 승리를 기록했다. 의미 있는 기록에 축하를 보낸다"고 흡족해했다.
한화 황준서가 31일 KT전에 선발 등판해 위기를 넘기고 기뻐하고 있다.
만원 관중 앞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른 황준서. /사진=한화 이글스
위기 관리 능력이 돋보였다. 황준서의 대답은 신인의 것이 아니었다. "위기 상황 때 최대한 즐기려고 마음 속으로 주문을 했다. 위기를 잘 막아내 이렇게 승리 투수를 할 수 있었다"며 그 비결에 대해 "형들이 점수를 엄청 많이 내줘서 편하게 던질 수 있었던 게 큰 원동력이었다"고 공을 돌리기도 했다.
연신 포수 최재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경기 도중 그의 사인에 고개를 젓는 일도 있었다. 이에 황준서는 "최대한 최재훈 선배님을 믿고 던졌는데 그 상황에서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져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고개를 저었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로 스플리터를 던지는 일이 많았다. 황준서는 "커브가 힘이 있을 때는 나쁘지 않기 때문에 별 지장이 없지만 (위기 때는) 가장 자신 있는 공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팀이 연승을 달리는 동안 2군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콜업이었음에도 황준서는 "빨리 짐을 싸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고 1군에서 최대한 오래 있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잘 했다"며 "선발승을 다 차례대로 했기 때문에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가장 긴장하면서 열심히 던졌다"고 털어놨다.
선배들의 축하도 잇따랐다. 5회를 마친 뒤 소감을 묻자 "마음이 편했다. (5회에서) 끝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마음을 편하게 놓고 형들이 축하해 주는 거 다 봤다"고 말했다. 류현진이 첫 탈삼진에 직접 문구를 적어 주기도 했는데 "(응원) 단상에서 받았다. '1번 타자 삼진'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한화 황준서가 31일 KT전에 선발 등판해 이닝을 마치고 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한화 이글스
다음 차례엔 김민우가 선발로 등판한다. 이날 호투로 황준서는 당분간 1군에 잔류할 전망이다. 보직은 불펜. 황준서는 "일단 1군에 있는 게 목표"라며 "어떤 보직이든 1군에 있을 수 있으면 다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직접 느껴본 팬들의 기운에 전율을 느낀 황준서다. "전날은 올라와서도 선발이어서 먼저 집으로 향했다"며 "8회 때 육성 할 때 놀랐다. 한 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어마어마했다"고 말했다.
승리가 확정된 후 중계사 인터뷰를 마치자 선배들이 하나 같이 달려들어 물 벼락을 선사했다. 황준서는 "앞에 동주 형밖에 없어 혼자 하는 줄 알았는데 뒤에 다 계셨다"며 "물이 생각보다 차가워서 깜짝 놀랐어요. 춥다"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김광현보다는 '리틀 류현진'이라고 불리고 싶다는 황준서의 합류로 인해 최원호 감독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지난해까지도 고심이 깊었던 한화는 닮은꼴 류현진과 황준서의 합류로 선발 왕국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경기 후 류현진(오른쪽) 등 동료들에게 물 세례를 받고 있는 황준서(오른쪽).
류현진(오른쪽)이 황준서의 1호 탈삼진 공에 문구를 적어주고 있다.